본질(質)과 형식(文)을 아우르는 '통섭'에 대하여
"질(質)이 문文)을 이기면 촌스럽고, 문(文)이 질(質)을 이기면 겉치레가 된다. 문과 질이 잘 어울린 후에야 군자다워진다." - 『다산의 마지막 질문』 중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알 것이다. 또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 또한 심심치 않게 들어봤을 것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의 관계를 두고 이처럼 상반되어 보이는 말을 동시에 받아들인다. 내면의 진실함이 중요하다는 가르침과, 세련된 표현과 태도가 경쟁력이라는 현실적인 조언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깊은 고민에 빠지곤 한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더 중요한가?
이 오랜 질문은 비단 몸과 마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본질과 형식, 실력과 표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이 두 가지 가치의 절묘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과제와 마주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공자는 겉치레보다는 묵묵히 내면을 갈고닦는 수양을 절대적으로 강조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러나 그는 2500년 전, 이미 이 미묘한 균형의 중요성을 꿰뚫어 보았다. 본질, 즉 '바탕(質)'이 너무 강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꾸밈(文)'을 압도하면, 세련되지 못한 투박함, 즉 야성(野性)에 머무를 뿐이라 말한다. 반대로 꾸밈이 바탕을 능가하면, 속은 텅 비고 겉만 번지르르할 뿐이라고 경고한다. 본질과 형식, 그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아름다운 조화'야말로 군자다움의 본질임을 공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약육강식의 무대였다. 수많은 사상과 국가가 명멸하던 혼돈의 시대, 숭고한 이상은 그것을 실현할 현실적인 힘과 지혜를 갖추지 못하면 공허한 외침으로 사라지기 십상이었다. 공자 자신이 이상을 펼칠 군주를 찾아 천하를 떠돌았던 사실은 그의 사상이 결코 서재에 갇힌 탁상공론이 아니었음을 방증한다. 내면의 인(仁)을 갈고닦는 일만큼이나, 그것을 예(禮)라는 품격 있는 형식으로 표현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능력이 절실했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면, 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지혜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유효한 거울이 되어준다. 진실한 마음과 깊은 실력을 갖추었으나 표현이 서툴러 세상과 불화하는 외로운 천재들, 화려한 언변과 세련된 매너를 가졌으나 신뢰를 주지 못해 관계가 겉도는 사람. 이렇게 우리는 주변에서 '질'과 '문'의 불균형이 빚어내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하곤 한다.
공부와 투자, 나아가 인생의 모든 배움 또한 그렇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學而不思則罔),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思而不學則殆)." 지식만 쌓고 생각하지 않으면 헛똑똑이가 되고, 신념만 있고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 각자의 상황 속에서 적절한 조화를 이뤄가며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진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육체와 정신,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정답은 한 쪽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단단한 정신이 건강한 몸을 이끌고, 건강한 몸이 정신을 지탱한다. 어느 하나만이 아닌, 이 두 가지 모두가 조화롭게 함께 나아갈 때 제일 빛이 나는 법이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단순한 산술적인 균형을 넘어선 '통섭의 경지'다. 이는 어중간한 태도나 양쪽 모두에 깊이가 얕은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 극단을 깊이 있게 경험하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아우를 수 있는 성숙함에 가깝다. 바탕을 단단히 하되 그것을 세련되게 표현할 줄 아는 지혜, 깊이 파고들되 동시에 넓게 아우르는 시야를 갖추는 것. 이 경지를 성취하기 위한 꾸준한 과정 속에서, 우리의 삶은 비로소 거친 원석에서 영롱한 보석으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