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된 시작

28년을 미뤄온 프로젝트, 이제 시작

by 임세상


초등학생 때 '히어로'라는 제목으로 시를 하나 썼다.

지하철 손잡이를 하나씩 몸의 중심으로 쓰며 서서 가는 사람들을 로봇이나 복면을 쓴 히어로로 그려 넣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돈을 벌기 위해 가기 싫어 죽겠지만 꾸역꾸역 출근하는 어른들은 각 가정의 영웅이다!라는 내용으로.

(그땐 가장의 부담감이 되게 어른스러워 보였다.)


중학생땐 어른이 되면 밝은 미소나 웃는 얼굴은 저절로 사라지는 거라 생각했고, 사춘기였던 나는 특별하니까 어른이 되어서도 많이 웃으며 밝게 살 수 있겠노라 생각했다.

(500원짜리 포도맛 슬러시를 빨대로 퍼먹으며 학교운동장을 친구랑 뺑글뺑글 몇 바퀴씩 돌면서. 친구도 나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동의해 줬다)


고등학생땐 내내 갇혀있던 게 그때부터 신물이 났는지, 아님 일찍이 사회적인 암묵적 룰에 이상함을 느꺘는지, ' 나는 자면서도 돈을 벌고 싶다'라고 말하고 다녔다가 짝사랑했던 오빠가 특이하다며 놀렸다. 내 생각이 맞고 난 그럴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그 오빠가 목표로 했던 육사에 갈 성적으로 올려보려고도 했다.

(합격컷 근처에도 못 가고 실패)


대학을 가선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공기업 인턴을 찾아 해 봤고 지금 생각해 보면 거기가 다녔던 회사 중에 젤 좋았음에도 (칼퇴 보장, 연차 눈치 없음) 그때도 세상이 나에게 거짓말 친다고 느꼈다.

계속 여기서, 이렇게 산다고?

어른이 되면 학생 때보다 더 따분하고 별다른 것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려고, 이 기억을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아 타 투도하고 혼자 결의에 차서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며 염병천병 지랄 생쇼를 그때 다했다.

아마 될 줄 알았던 약대입시에 실패하고 남들이 다가는 취업길을 걷자니 그렇게 살기 싫어서 한 충동적인 행동들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그때 해서 다행인 일들.


졸업 전엔 '대졸-취업-결혼-육아-퇴직' 루트가 싫어서 무작정 해외살이를 동경했고, 미국에 눌러 살 기회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막상 기회가 만들어지고는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가 마음에 걸려 기회를 포기했다. 이건 아직도 후회 중)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미루고 미루다 이젠 정말 도망갈 곳도 시간도 없을 때 꾸역꾸역 취업을 했고 즐길거리가 많은 서울에서 살아봤지만 끔찍한 지옥철에 이골이 났다.

그래서 본가로 내려와서 다시 직장을 잡았다.

(지방은 다르겠지 싶어서)

그랬더니 서울 살 때보다 집을 더 늦게 온다.

(야근 강요)

다들 이렇게 산다면서 오래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얼른 집사라던데 (엄마가) 그렇게 돈 많이 들인 집에 저녁시간 다 지나서 들어와선 씻고 잠만 자고 다음날 바로 나가야 된다는 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재미도 감동도 없는 일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아침 9시부터(집은 7시 30분에 나간다) 저녁 7시(집은 9시에 온다)까지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이상을 써야 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근데 또 남들은 다 이렇게 사는 게 맞다며 그러고들 있다.

내가 이상해서 나만 자꾸 의문점이 생기는 건가 싶었다.

바이오, 제약 업계 특성상 경직된 직장문화라 야근이 강요되고 수많은 가오와 강압에도 감사히 그들의 똥꼬를 빨아야 하는(비유적 표현)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시간을 4년은 버텨야 그나마 옆자리 대리랑 직급과 연봉이, 미간의 주름의 깊이가 같아진다는 점, 그때도 집 가면 밤 9시, 10시일 거라는 점이 술 먹은 다음날 꾸는 꿈처럼 말도 안 되게 다가왔다.


현실과 내가 원하는 삶의 괴리가 가져오는 울렁거림이 내면의 뭔갈 억압했고 겨우 모른 척해왔던 진실을 꺼내야만 된다고 느꼈다.

교복 입던 시절부터 가졌던 의문, 9 to 6 사무직이면 훌륭한 거라는 어른들의 훈수, 아닌 거 같아서 직접 겪어보니 역시나 아니었던 라이프 스타일, 다들 그렇게 산다길래 이 악물고 수긍하며 밝은 성격 버려가며 버틴 시간들.

차라리 직장생활을 못해서 욕먹고 뛰쳐나올 수밖에 없다면야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아무도 못 버텨서 최대 3개월 다니고 나간 그 자리에 최초로 인정받고 있어서 때려치우자니 아까워서 미칠 노릇.

해당 직무 첫 신입 채용, 정규직 전환.

(그만큼 팀장이 만만치 않았지만 나 또한 그간 먹어온 눈칫밥으로 꼰대스러울수록 뭘 원하는지 다 보여서 직장생활은 쉬웠다 - 그저 열심히 하는 척, 일찍 와서 늦게 퇴근, 타 팀욕하는 거 공감하는 척, 기분 안 좋으신 날 트집 잡혀 혼나도 인상 쓰지 말고 무조건 너무 죄송한 표정 짓기, 보고드릴 때 굽실대기, 나를 지우고 주장하지 말고 완벽한 노예가 되기)

차라리 원하는 일, 나만의 확고한 사명, 혹은 그럴듯한 계획이 있었다면 결심도 행동도 쉬웠을 터.



애매한 건 나쁜 거다


애매한 중위권 성적, 애매한 수도권 대학, 애매한 졸업성적과 영어실력으로 애매한 회사에 다니는 애매한 내가 애매한 느낌만으로 원하는 대로 살자고 남들 다하는 직장생활을 때려치우자니 정말 애매해질 것 같다.

젤 애매한 건 그렇게 엄청나게 하고 싶은 것이 딱히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노답이다.


젤 좋아하는 것? 여유롭게 씻고 내 방 침대에서 편하게 잠드는 거

그럼 흥미는 둘째치고 열정을 갖고 어디서 성공을 해봐야 하나?

나에게 성공이란? 출세, 전문직, 고연봉?

아니 그냥 스스로 만족하는 삶, 나 같은 경우엔 자유로운 라이프 스타일(이동의 자유, 은행이나 우체국을 가려면 연차를 써야 된다는 게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약대를 준비하면서 느꼈지만 나에게 동기부여는 간절함보단 억울함이다.

이렇게 살기 싫은 거 알면서 아무것도 못해보면 죽기 전에 후회할 게 확실해서.


명확히 아직도 뭘 해야 될지는 모른다.

재택근무부터 시도해보려고 한다.

아니면 다양한 시도에 브레이크를 없애줄 더 높은 연봉이라던가. 그러면 또 하루를 다 쓰겠지만

꼭 하루 8시간 일해야 되나?

나 진짜 4시간만 일할 수 있게 만들어봐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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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적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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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했던 고민의 흔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