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규칙을 위한 생각들 #01 이원재 LAB2050 대표
좋으나 싫으나 오늘의 청년들이 해야 할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새로운 사회 변화를 읽어내고 미래 사회에 어울리는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일입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사회 변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또 미래 사회를 살아갈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연재물 <새로운 규칙을 위한 생각들>은 그 고민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로 꼽히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 <우리 후손들의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에세이에서 100년 뒤 세계를 예측합니다. 2030년이면 전 인류가 주당 15시간만 일하고도 다 같이 먹고 살 만큼 충분히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분석합니다.
지금 우리는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바로 케인스가 예측했던 시기를 지나고 있으면서, 어쩌면 그 예측보다 더 큰 변화가 일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유토피아적 기대가 샘솟고 있습니다. 자율주행차가 몇 년 안에 주요 도시 도로를 누비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한국 사람의 기대수명이 세계 1위에 올라섰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인공지능과 블록체인이 경제와 정치를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옵니다.
다른 편에서는 디스토피아적 불안도 커집니다. 커져만 가는 불평등과 불안해지기만 하는 고용시장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울산과 거제와 통영과 군산에서 문을 닫거나 구조조정에 나선 기업들의 소식이 속속 들려옵니다. 올해 합계출산율은 1명 아래로 떨어지고, 인종 간, 세대 간, 성별 간 갈등도 깊어져만 갑니다.
이 혼란과 전환 뒤 다가오게 될 사회는, 유토피아일까요? 디스토피아일까요?
전환의 시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들을 던집니다.
자동화와 함께 일자리는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빠른 자동화를 이어가야 할까요?
택시 회사와 기사들의 어려움이 커지더라도, 이동서비스의 혁신은 필요한 것일까요?
고속도로 요금소 계산원을 없애게 될 스마트톨링 시스템은 얼른 도입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닐까요?
무인지하철은, 자율주행차는 어떨까요?
생명과학 규제는 풀어야 할까요?
이민과 난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인정보보호가 먼저일까요, 데이터의 개방과 활용이 먼저일까요?
자동화가 심화될 미래에는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해야 할까요,
아니면 국가가 보장하는 일자리를 늘리는 데 집중해야 할까요?
아니면 둘 다일까요?
미래는 사실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닙니다. 이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제출하는 대답의 모음이 바로 미래입니다. 미래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답을 누가 제출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저는 지금의 청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은 누구일까요?
구직에 지친 불안정한 계층이라거나, 재산이 없는 가난한 계층이라거나, 미숙한 연령대 계층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청년들은 무엇보다 미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주인들입니다.청년들이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지금 청년들이 겪는 문제가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보편화될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법도 청년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야 앞으로 한 세대 동안 유효한 해법이 됩니다.
전환의 시대, 세계는 지금 실험 중입니다. 미국식 시장주의도, 유럽식 복지국가도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다 보니 대안을 찾는 실험을 여기저기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단단한 껍질 안에서 웅크리고 있습니다. 빠른 경제성장의 경험이 오히려 ‘승자의 저주’가 되어 발목을 잡는 모습입니다.
이럴 때, 과감하게 실험에 나서야 할 세대가 바로 청년들입니다. 청년들이 주도해, 과거 질서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는 사회 실험을 진행해야 합니다. 이미 사회에 자리 잡은 앞선 세대는 그러기에는 과거의 기억이 너무 강하고 현재에 잃을 것이 너무 많습니다.
20년, 30년 뒤에 전환된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지금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입니다. 지금 청년들은 그때는 이미 기성세대일 것입니다. 오늘 청년이 나서야 하는 이유는, 당사자로서 지금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금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살아갈 세상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살 사회가 지금보다 좀 더 나은 곳이 될지 아닐지는, 지금 모든 문제의 입구에 서 있는 청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케인스는 <우리 후손들의 경제적 가능성>을 맺으면서, 미래에 ‘경제 문제’가 사라진 시대가 오면 ‘경제학자’라는 직업도 쓸모가 거의 없어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덧붙입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경제학자이자 정책가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케인스가 경제문제가 사라진 세계, 경제학자가 쓸모없는 세계를 꿈꾸었듯이, 우리는 청년들이 더 이상 호명될 필요가 없어지는 시대를 꿈꿔보면 어떨까요?
청년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고, ‘세대’가 더 이상 ‘갈등’과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며, 바야흐로 청년이 ‘자치’라는 용어로 스스로를 호명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오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자치가 그런 시대로 가는 길을 열 것이고, 과거를 뒤돌아보는 자치가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자치가 그런 시대를 앞당길 것입니다.
그냥 ‘미래’가 아니라 지금과는 전혀 다른 ‘미래의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과정을 짊어지겠다고, 어려운 질문을 피하지 않고 맞닥뜨려 답을 찾아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그들이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