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밀어내겠다는 다짐으로 겨울의 영역에 이미 들어와 버린 봄이 오히려 겨울에 밀려버렸다. 겨울이 밀어냈다. 기분이 나빴던 봄은 자신만의 경쾌함이나 신선함을 내면에 움켜쥐고 자취를 감추려고 한다. 봄이 사라지려고 한다.
해마다 봄이 되기 전에 수애는 봄을 놓칠까 봐 자취를 감추려는 봄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과장했으며 온몸으로 미리 준비했다. 수애는 항상 이른 봄을 준비했었다. 수애가 준비한 봄은 겨울을 살짝 걸치고 있는 3월 어느 날 도서관을 향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걸음은 전투적이었다. 봄을 향해 걷고 있던 수애가 준비한 봄, 코끝은 찡했고 손끝은 시렸다. 수애의 눈빛은 흐려졌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봄을 준비하는 시기면 갈등하고 고민한다. 매너리즘에 빠진다. 자신의 자리가 지나치게 편한 건 아닌지 봄을 너무나 편안하게 맞이하는 건 아닌지.
수애가 지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것은 봄을 앞서 가고 있는 겨울을 밀치거나 남보다 조금 이른 봄마중을 하겠다는 각오였다. 수애는 그렇게 봄을 따라다니는 달콤한 노래를 쫓고 있었다.
루이즈를 만났다.
길을 걸으며 책 속의 루이즈를 생각했다. 루이즈와의 만남은 잔인했다. 무엇보다도 어린아이가 희생양이 되었던 것,첫 만남은 그것 외에는 기억이 없다. 그 어떤 논리를 가지고 다가가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너무나 가혹했다. 그녀가 사는 세상이 자신이 함께 존재하는 곳이라는 그 기분이, 수애를 더 아프게 했다. 인간의 성장통에 관하여. 인간은 외부 자극으로 성장한다. 지독할수록 좀 더 크고 많이 성장한다. 루이즈를 따라 걸었다. 그녀가 움직인 동선을 따라. 루이즈의 과거를 천천히 훑어본다. 수애도 감추려는 것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애써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대부분 인간의 삶이고 방어 기제가 아닐까.
어느 봄날, 다시 루이즈를 만났다.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길, 수애는 의도적으로 천천히 걷었다. 시선은 평소 그녀의 호기심 가득한 모습이 아니라 관조적인 모습이다. 바로 갈 수 있는 길을 돌고 돌아서 움직였다. 루이즈를 느껴보고 미리암과 폴에게 다가가려 애썼다. 루이즈가 느끼는 불안은 수애의 불안과 매우 흡사하다. 권태와 불안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것도.
루이즈는 병사다.
수애와 '책이랑 토론이랑' 멤버 모두 병사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진한다.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다. 훈련된 경기마처럼. 앞으로 앞으로 나간다. 수애는 잠시 엄마를 생각했다. 어린 시절 수애가 바라본 엄마의 모습은 전진하고 전진했다. 당장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병사처럼. 다만 엄마는 루이즈보다는 자신을 드러낼 줄 알았다. 상처가 오래 머물러 염증이 커질 만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토닥토닥 토론에서 만난 루이즈는 관계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철저하게 이방인이었다.
그녀는 관계에 있지 않았다. 관계로 얽히지 않았고 소통하지 못했다. 루이즈는 처절한 외로움을 무기력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항상 지켜만 보는 이방인이었다. 세상은 거리 두기를 지켰던 그녀에게 경계를 없애며 그곳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미소 지었다. 따뜻한 마음에 이어 덥석 손을 내밀었다. 순간 그녀는 경계를 풀고 가족이 되었다. 가족이라 믿었다. 그녀의 해석으로는. 그녀의 마음에서는. 다시 그들은(미리암과 폴의 가족) 차갑게 밀어냈다. 상처도 함께 던졌다. 수애는 루이즈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궁지로 몰린 그녀의 세상이 마침내 수애가 존재하는 이 세상과 닿고 있음을 인지했다. 어쩌면 일치하는지도. 우리는 모두가 가해자였다. 루이즈를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궁지로 몰아갔다.
"저녁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 그녀는 소금의 맛, 유토피아의 맛이겠구나 생각한다."
이방인으로의 루이즈가 그들 속에 들어가고 싶었던 순간이다. 정숙은 그때의 루이즈에 가장 크게 이입이 되어 유토피아의 맛을 느끼며 그곳에서의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미리암이나 폴이 느끼는 감정의 몇 배를 느끼고 싶었던 걸까? 정숙의 묘한 시선 처리와 입꼬리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수애는 정숙과 루이즈를 하나의 인물로 잠시 착각했다.어쩌면 정숙은 숙련된 부르주아의 자리에서 루이즈의 감정을 이해하고 느끼려고 애쓰는, 공감이 부족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선미는 사춘기인 아이들과의 요즘 생활을 잠시 얘기했다.
"아이들 곁에서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아이들은 우리의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 관심이 없다."
작가의 얘기에 선미는 깊은 공감을 했다. 그래서 요즘 들어 더 우울했다. 마음이 아프다며 자신의 감정을 함께 전했다. 책을 읽고 더 확실해진 자신의 감정을 누르지 않고 표출하는 연습을 했다. 수애는 선미가 안쓰럽다. 선미의 마음이 읽히자 자신과 루이즈까지 모두가 오버랩된다. 수애에게 아이들은 곁에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오른 냉정한 '새'와 같았다. 사랑을 듬뿍 과할 만큼 주었더니 어른들의 세상, 이곳을 더 이상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현실은 수애에게도 냉정했으며 상처투성이였다.
아기가 죽었다.
아당은 루이즈를 좋아했고 따랐다. 밀라는 저항했고 경쟁했으며 싸웠다. 결국 생활에서 밀라는 루이즈에게 밀려버렸다. 죽음의 현장에서도 아이들의 성격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아당은 저항하지 않았다. 밀라는 사나운 짐승처럼 맞서 싸웠다. 죽음은 주변의 모든 어둠을 삼켰고 아파트 전체를 덮었다.
준희가 묻는다. 멤버 모두에게. 당신에게 죽음은 어떻게 다가오는지.
먼저 준희는 편안한 죽음 자체는 없겠지만 아주 편안한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멤버들을 향해 우리 나이가 죽음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거부할만한 시기는 아니라고. 이제 조금씩 삶을 정리를 해야 하는 시간이지 일을 벌이는 시간은 아니라고 했다. 수애는 죽음은 여전히 두려웠고 그 감정은 자신을 갉아먹기도 했다며 두려움에 대해 천천히 꺼내본다. 수애가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했던 건 뒷모습 때문이었다. 자신이 죽고 난 후 뒷모습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뒷모습에 대해. 사실 그때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뒷모습이 단정하든 어수선하든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건 단지 남아있는 자들의 얘깃거리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여전히 뒷모습에 신경이 쓰였다. 벗어나지 못했다.
토닥토닥 토론 멤버 대부분이 크게 공감한다는 듯 깊은 숨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쏟아져 나와 토론의 분위기가 더 묵직해졌다. 토론이 마무리되고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서지만 수애는 멍한 모습으로 여전히 그곳에 앉아있다.
5월 어느 날의 심장 뛰는 소리는 살인으로 아파트 전체를 휘감았다. 달콤한 노래의 5월은 너무나 잔혹했다. 잔혹한 이야기를 덮는 정리는 허전했으며 쓸쓸했다. 고독을 느끼지도, 도저히 찾아낼 수 없을 만큼 잔인한 모습으로 닿았다.
수애는 여전히 텅 빈 그곳에 앉아있다. 여러 경험을 통해 자신과 루이즈의 시선이 일치하는 것을 깨닫는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도서관을 나서며 우리 사회의 보편적이지 않은 루이즈의 시선을 따라 움직여 본다. 그렇게 천천히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며 걸어온 길을 다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