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펑 소리 내어 울어도 보고 구석에서 숨죽여가며 흐느껴 울기도 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지연은 희령을 여름냄새로 기억한다고 했다. 과연 수애는 엄마가 계신 한울을 무엇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수애는 지금 자신의 존재 자체를 유한하게 해 준 일산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녀는 엄마를 무엇으로 기억하는가? 바다냄새, 자동차 냄새로 한울을 기억할까?
수애는 책을 읽고 감정을 분산해 보려고 애썼다. 뭉친 감정이 풀리지 않아 잠시 힘이 들었다. 과거의 역사 속의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모든 여성들은 혼란한 틈에 자신을 지켜내려고 침묵하며 단단히 섰다. 무엇보다 자식과 가족을 지켜내려고 죽음으로의 길을 알아채고서도 묵묵히 그곳으로 걸어간다.
낮 달 같은 존재들. 수애에게는 할머니 어머니, 언니, 수애자신까지 모두다 '낮 달'과 같은 존재이다.
그녀들에게는 자신이 가진 힘 있는 에너지가유연하게 드러났으며 표출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그들 모두, 각자 다른 소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네온사인보다 더 강렬한 햇살아래 또는 햇살 주변에서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감추고 있었다. 낮이기에 그 빛은 희미했고 힘을 잃은 듯 조용히 자리를 이동하며 애잔하게 하늘 위 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해 주변에서는 환하게 웃고 빛을 내지만 강렬한 해에 가려 존재가 잊힌 달, 그녀들 모두 그렇게 더 강한 빛 주변에서 드러나지 않은 빛을 내고 있었다.
삶 전체가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라면 그래도 순간과 찰나에는 그녀들 곁에 함께한 친구들이 있었다. 순간과 찰나가 과거로 묻히면 연속된 삶의 일부 또는 전부가 되는 것처럼 친구는 그녀들에게 그런 존재였다. 앞에 놓인 시간은 헤쳐나가기 힘들 만큼 어두웠지만 주변을 밝게 비춰줬던 친구들. 등장하는 모든 비겁한 남자들과는 달리 새비 아저씨는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고 할머니 영옥은 기억했다. 새비 아저씨는 햇살 같은 존재였다고.
도서관으로 가는 동안 도서관 주변 공원을 두 바퀴 돌고도 몇 번째 더 돌고 있는지 수애는 기억을 더듬으며 숨을 헐떡였다. 이제 곧 도서관으로 들어가야 한다. 주변을 서성이며 혼란스러운 맘을 달래려는 산책에서 엄마를 몇 번이나 떠올렸는지 모른다. 수애에게 엄마는 좀 다르다. 더 아프기도 하고 더 힘이 되기도 했다. 그녀에게 엄마의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수애에게 엄마의 존재는 가끔 캄캄한 바다를 지키는 등대보다 더 아련히 맘을 건드렸다. 아련한 밝은 밤의 공간에서 수애는 엄마의 빛을 걱정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해가 지면 그만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엄마는 다시 빛을 내리라는 당연한 믿음이 있었기에. 수애는물리적흐르는 시간 안에 놓인 엄마도, 시간 안 상처로 긁힌 흔적도, 누적된 상흔으로 다친 마음도 모두 이해했다며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는.
수애는 '이제'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아프다. 그녀 자신도 함께 걷기 시작한 이 길을 엄마에겐 잠시 멈춤을 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엄마에게 물리적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그때까지라도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도서관에 모인 그녀들의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다. 각자 여러 생각들로 마음이 무거웠던 모양이다. 책 속 연지는 몇 대에 걸친 이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아팠으며 그녀들의 삶에서 우리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배웠고 학습했고 관습처럼 따라왔다고 하기에 그들은 너무나 비겁했고 그녀들을 비참히 짓밟았다. 수애 역시 어쩌면 우리가 사는 지금도 여전히 과거 우리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숙이 소리 높여 말했다. 관습 되어온, 학습되어 온 그들의 되물림을 그들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정숙은 그들이 모두 비겁하다고 생각했지만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이 가장 불쌍한존재일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도서관에 모인 대부분의 멤버는 그 말을 이해하면서도 분노했다. 정숙이 그들에게 갖는 연민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어떤 것도 과거 그들의 바탕에서부터 대물림된 비인간적인 실천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학습된 것 관습으로 이어오던 것들 대부분이 그렇다 해도 그들이 행해온 비겁하고 인간적이지 못한 그 행동들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준희는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수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것을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 있을까?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만큼 천한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책 속 할머니 영옥이 던진 질문은 수애를 더 아프게 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상처가 악한 아픔이 되어 자신을 할퀴고 찌르고 무거운 쇳덩이로 누르기도 한다. 상처에서 오는 선한 아픔이란 상처를 녹여낼 만큼의 유연하고 아름다운 인내와 이해가 있어야 할까? 잠시 고통스러워하던 수애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희령에서의 지연처럼 수애는 이제 막 접어든 자신의 50대와 엄마의 70대는 다른 시간으로 흐르고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밝은 밤의 지연이 느꼈던 것처럼. 감정적이지 않은 사랑을 가슴으로 느껴야 했다. 모순 가운데서 수애는 다른 시간 다른 속도에서 사랑을 알아차려야 했다.
수애는 [밝은 밤]이 좋았다. [밝을 밤]을 읽는 자신이 애잔했다. 엄마가 자꾸 그려져서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밝은 밤]은 수애를 이해할 거 같았다. 토닥임이 느껴졌다. 밝은 밤은 은은하게 수애를 다독였다. 스토리도 결말도 지나친 강요나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어두운 밤 주변환경에 어스름하게 빛을 내는 보이지 않은 달처럼 그런 사람, 그런 환경 하나만 있더라도 삶이, 그 속의 자신이 밝을 수 있다는 것을. 수애에겐 그게 무엇일까? 엄마일까? 딸, 책... 그녀는 다시 생각해 본다. 자신에게는 또는 자신은 누군가에게 그런 밝은 밤이 되고, 되어 왔을까.
그 어떤 것도 해결된 것은 없다. 우리의 삶도 같다. 이유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수애는 조용히 은은히 비치는 빛을 보며 따라서 묵묵히 움직였다.
처음 준희와 정숙과 혜린을 만났을 때 짐작하고 다짐했던 일, 이제는 더 이상 아픔을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 두지만은 않을 거라는 다짐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책을 읽고 나눔을 했을 때, 언제부터 수애는 그녀들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준희의 유연해진 분위기, 정숙은 관계는 시간과 인내와 함께 한다는 걸, 혜린의 과하지 않은 차분한 공감능력까지 모든 것이 성장하고 있었다. 다른 멤버들도 변화의 과정 위를 걷고 있었다. 수애는 자신의 마음도 긴 삶이라는 여정의 직선 위에 있으며 기울기는 완만하게천천히 변화하고 있다고 믿었다. 믿음은 점차 확신으로 바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