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언니에게
잘 지내고 계신지요? 넓은 집에서 혼자서 지낼 언니를 생각하며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경계를 떠올려 봅니다. 그 경계는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부러움과 관심의 최상의 자리로 다른 누군가의 눈높이에서는 외로움과 고독의 자리로 보일 텐데요. 언니는 어떤가요. 잘 지내고 있는 거죠.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기억으로 차곡차곡 잘 저장하고 있는지. 혹시 특별한 기억이나 추억이 평범한 일상처럼 느껴지나요? 인간은 묘하게도 정신없이 걷는 삶의 과정이 끝나가면 마침내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게 되더라고요. 그걸 자아 성찰이라고 하죠. 요즘 저는 성찰의 과정에서 깊은 번뇌에 빠졌어요. 지나치게 깊어져서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얼마나 시간에 쫓겨 다녔는지 당신의 안부를 묻기도 어려웠어요. 그래도 잘 지내고 있으리라 믿어요. 내가 집중하고 있는 수학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때론 아름다울 수 있으나 가끔 세상에 밀려버린 공간에서 혼자만 동떨어져 살고 있는 건 아닌 가하는 의문이 들어요. 언닌 지금 어떤지요. 세상과 그럭저럭 소통하고 지내겠죠.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는 어떤가요?
지금 내가 아픈 건 아픈 현실을 더 아프게 바라보기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님 아픈 현실을 쫓아가지 못하며 그 개입으로 생긴 마찰력 때문인지... 천천히 살펴보는 중입니다. 얼마나 더 아프고 깊은 상흔이 남아야 대부분 흐름대로 원하던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언니, 시간과 세월에 놓인 당신의 호흡과 사랑 그리고 한때의 분노, 넘치는 에너지가 당신을 이루는 원소이며 곁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나 또한 이제 겨우 알게 되었답니다. 큰 시련이 닥치고 폭풍우가 몰아쳐야 우린 가혹한 현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나 봅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일이 거대한 화산을 만들기도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경우도 있었답니다. 과거, 그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극도로 예민했던 나를 돌아보니 가슴이 아픕니다.
그땐 치열하게 온몸의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을 알면서도 싸웠는데...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죠. 그대로 두었으면 흐르는 것을.
언니는 혈연의 관계는 아니지만 경계심이 강한 내가 처음으로 ㅇㅇ언니가 아닌 그냥 언니라 부른 경우였습니다. 그건 관계에서 한 사람만큼 경계의 벽이 허물어졌다는 걸까요. 그것으로 시작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너그러워졌어요.
요 며칠 입안이 헐고 목소리가 안 나올 만큼 앓고 일어나 보니 세상이 다시 보입니다. 모두 덥고 따갑다고 느끼는 봄 햇살이 나를 향해 길게 내비칠 때면 감사함이 저절로 묻어 나옵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누워있을 때 아파트 사이를 통과하며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맘은 연애편지를 받은 거만큼이나 설렙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 봄의 향연이 시작됩니다.
아직 여름에 밀리지 않은 봄을 창조한 건 신의 한 수라 생각합니다.
사실은 누구보다 나에게 봄은 잔인한 계절입니다. 봄은 언니의 짐작보다 훨씬 더 나에게는 잔인했습니다. 5월 어린이의 날을 앞둔 2일 전 내 아이를 자연으로 귀속시켰고 엄마의 암소식과 아빠가 세상을 저버린 시기도 모두 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토록 심하게 앓고 있는 지금도 봄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봄을 야속하다거나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봄은 딸과의 추억으로 모든 비극을 덮은 행복을 선물한 날이기도 하니까요. 경이롭고 아름다운 사랑이었습니다. 딸과 벚꽃 잎 흩날리는 길을 걸으며 꽃 눈을 맞으며 오일러의 항등식으로 봄을 노래했던 그 기억은 오늘도 일주일 뒤에도 일 년 뒤...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행복의 밀도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컸고요. 그 상큼하고 따뜻한 사랑이 여러 잔인했던 봄 기억을 모두 지워줍니다. 상흔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이제는 충분히 읽고 두드리고 확인하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언니의 봄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토해내듯 나의 봄을 두서없이 읽다 보니 문득 언니의 봄은 어땠는지 궁금해집니다. 여러 감정과 욕구와 상황의 경계에 있을 언니를 생각하면 봄이야기를 감히 들려달라고 하기 송구합니다. 하지만 답답함과 억눌렸던 감정이 풀리리라 믿고 다시 떼를 써봅니다. 언니의 봄은 어땠나요. 이제는 언니의 봄이야기를 들려주세요.
ps 언니의 생일을 맞이하여 축하와 감사를 보냅니다. 지금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나이, 거리, 시간 등 수에 대해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허물을 벗어 던지며 색을 덧 입히기도 합니다. 언니가 항상 안녕하기를 바랍니다. 흐름에 놓인 우리의 어제에는 박수를 오늘은 그 길을 묵묵히 걷고 내일은 다시 꿈을 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