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은 아주 무섭고 저돌적으로 생활에 스며들었고 시간 곳곳을 침범해서 누리고 있다. 바이러스와 함께 한 지난 2020년을 매듭짓지도 못했다. 현실에서의 우리는 무기력해지면서 이렇게 위험한 상황을 자연스럽게 직면하고 있다. 이젠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 그것을 재앙이라고 여길 만큼 지구 어느 한쪽, 곳곳에선 소멸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이후 죽음이라는 단절에서 비치는 숫자, 그 속에서 느껴지는 죽음은 단지 이젠 더 이상 생명의 존엄이나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이 아니다. 직면하고 있는 가족이나 직접적인 관계가 아닌 그 누군가에게는 그냥 통계적 수치로 다가올 뿐이다.
통계적 수치도 이젠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는 현실이 되었다. 이런 응급 상황이나 정신적 진통이 우리를 더 큰 두려움에 휩싸이게 한다. 이젠 백신이 만들어지고 벌써 전 국민의 70~80%의 백신 예방 접종이 확산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연일 확진자는 증가와 감소의 움직임을 불안정하게 보인다. 확진자는 꾸준히 1500명대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젠 모든 수치들이 통계적으로만 느껴질 만큼 현실 감각으로는 벌써 내성이 생겼다. 또한 코로나 19의 예방백신을 추가로 우리가 매년 해야 할 예방접종이 또 하나 늘었고 앞으로는 계속 증가하리라. 이건 바로 끊임없이 새로운 바이러스가 출현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가 무너지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과학과 의학이 발달함에 비례해서 좀 더 강한 바이러스들은 계속 새로운 출현을 할 것이다.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대비해야 할 것 또한 매일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종식의 의미로는 의식을 바꿔 생각하기 힘든 만큼 일상생활 곳곳이 무너져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일상을 찾으려는 움직임으로 지구는 위드 코로나를 선언하게 된다. 이제는 종식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의미가 어색할 만큼 환경도 우리의 인식도 변해버렸다. 아주 짧은 시간에 급진적으로.
개인적으로는 언젠가는 코로나19가 종식되고 우리들이 겪고 있는 지금과 같은 환경도 마침표를 찍을 날을 기대해본다. 바이러스의 종식과는 다르게 인간관계에서는 종식이 아닌 위드에서의 공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위드의 공존을 생각하며 나의 관계 맺기에 대해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돌아본다. 관계 맺기를 보니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관계 맺기나 생각의 단절은 죽음과 연계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나의 29에서 39 사이의 변화와 관계에 대하여
세상의 존재를 인식하고 세상에서 존재하는 자신을 확인한다. "내가 존재하고 있구나, 살고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건 '관계'를 통해서이다. 관계 맺기... 하지만 그 관계는 들어가면 갈수록,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스스로 힘들게 한다. 자연스러움에서 불편함으로 열정에서 귀찮음으로 소통에서 단절로 주장에서 포용으로 상대와 그대로 직면함 보다는 자신을 들여다봄으로 변화하고 다시 변함을 한다. 변신을 거듭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결론은 다양한 부분에서 변화의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29세의 관계를 경험하며 편협된 단정이 생겼다. 39세의 관계를 몸소 체험하며 새로운 경험으로 변화를 시작한다. 시행착오와 영속성을 이해하며 삶이 깊어졌다. 아픔은 그만큼 진해졌다. 많은 것을 이해하는 거처럼 보이지만 두려움으로 아직 시작 전인지도 모른다.
처음을 시작하게 해 준 부모님들과의 관계와 맺음 이후 우리를 본다. 그녀의 73세 그리고 그의 78세에 갑자기 마주하게 된 관계가 아닌 (생각의) 단절에 대하여 삶을 둘러보고 죽음을 수용한다.
죽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단절은.
삶과의 가늘고 가는 끈 사이에서는 어떠한 생각이라도 의지의 감정을 바탕으로 덧 입히기, 또는 차이나는 생각... 뇌가 움직이는 순간은 누가 뭐래도 연결고리가 있다. 그게 관계이며 우리는 그것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리고, 그때의 알고리즘들로 슬픔과 행복을 느끼고 견딘다. 때때로 아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직면하지만 그건 자신의 존재를,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또한 '그 순간'은 가질 수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특혜인 셈이다. 특혜, 선물.... 자신에게 주어짐이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 선물을 감사히 맘 다해 받고 싶다. 하지만, 앞으로 끊임없는 파도 뒤에 더 큰 파도가 우리를 덮쳐올 때처럼, 피해 갈 수 없는 관계와 더불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스스로 예민하게 만드는 상황들은 계속해서 반복되리라.
마침표
하지만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은 단절을 말해 주기도 하고 죽음을 대신해서 전하기도 한다. 요즈음 홀로서기 중인 엄마를 보니 그 마침표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그녀 73세의 자존심은.
짧은 말들로 엄마의 삶을 감히 대신하거나 옮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엄마는 우리의 많은 것을 쏟아낼 수 있는 세상 유일한 존재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과연 누군가에게 또는 어딘가에 자신을 토해낸 적이 있었을까? 그렇다고 엄마의 모든 것이 이해가 되거나 감동적이었던 건 아니다. 삶을 살면서 때론 엄마의 처신이 사랑에 있어서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런 처세 후 내게 돌아온 상처들은 친정 가족들에게 조차도 내면을 드러내지 못하게 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잔인한 말들을 뱉어 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결혼 이후였던 거 같다. 많은 것을 쏟아붓고 지원해준 딸의 현명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한 결혼에 대한 원망이었다. 엄마의 노릇은 딸의 탐탁지 못한 결혼이라도 결혼식까지 최선을 다함이었던 거처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도왔다. 결혼 이후 빚으로 시작된 결혼 생활에서부터 딸이 처한 환경, 부부의 무능력함을 반복해서 뱉어 냄으로 딸의 자존감을 끝도 없는 나락으로 내몰았다. 그것이 그녀의 위안이었나 보다. 그것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었나 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다치고 얼룩진 맘이 치료된 거처럼 온유함으로 자식들을 바라본다. 이젠 더 이상의 마음의 짐이 그녀의 진로를 방해하거나 무게를 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바라봄'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전에 없던 따뜻한 빛이 보인다. 냉혹한 현실을 견뎌 내느라 더 이상 금속으로 무장하지 않아도 되기에 나오는 빛이라고 여겨진다.
그녀의 73과 그의 78에 대하여.
결혼생활 내내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식에게 쏟았던 엄마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자존감이 낮은 남편과 제삼자들의 시선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했다. 그 실천은 좀 더 격렬하게 표현하고 강하게 지키고 드러내기에 급급했다. 그런 그들 사이의 관계가 폭력적 감정 쏟아내기 이후 그녀의 답답함 뒤에 감추어진 기대심리는 매번 자식들을 향했다. 그런데... 딸은 그녀를 다 헤아리지 못했다. 딸이 선택한 경험에서 오는 변화를 그녀는 감당하고 맞서야 했다. 끊임없이 추락하거나 다시 발돋움을 하려고 심호흡을 하고 있는 딸의 손을 붙잡아 끌었다.
그녀에게 그는.
그녀가 상처를 스스로 견뎌 낼 즈음 욕구에 차지 않고, 모든 삶을 하늘 저쪽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먼 곳까지 걷게 하던 그녀의 아픈 손가락 '그'는 2019년 4월 세상과 이별했다. 아빠가 별세하셨다. '그녀'에게서 '그'의 존재는 무엇이었으며 '그'의 소멸 이후 과연 '그녀'의 삶은 쓸쓸하지만 평온하고 안정적이었을까? 그녀의 입장에서 그는 평소 늘 손이 필요했다. 그는 힘든 삶의 여정들을 그녀 혼자 겪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끝도 없었던 힘든 여정의 마침표가 결국 찍혔다.
우리의 아빠.
자식인 딸이 겪는 그의 부재는 자식의 입장과 더불어 그의 외로움에 관한 것이다. 감정과 그 관점에서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아파한다. 아픔이 더 큰 아픔의 길을 타고 들어간다. 그의 마지막 삶이 자식으로서의 '노릇'까지도 나무란다. 이젠 아픔이 '깊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마침표.
결국 그녀에게 닥쳐서 찍힌 마침표가 완전히 시원하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자유로워 보이기는 커녕 방향을 찾지 못했다. 목적 없이 방황하듯 움직이며 길을 잃은 듯 보인다. 지금 그녀의 마침표는 소유했던 그것에 대해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하고 자식의 결론과 생각들을 신뢰할 수 없게 했다.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상처만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아니 그런 기억들을 만들어 냈다. 그 속에서 미세한 사랑과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하지만 뭔가 극도로 예민해지고 에너지가 관계 쪽으로만 치우쳐 있었다. 행복을 위한 만들어진 기억들과 단절된 기억들이 있다. 그렇지만 다시 인위적인 기억들로 지쳐버렸다.
그녀에게도 아직 어떤 부분은 찍히지 않은 마침표가 있으리라. 자식의 입장에서도 대부분은 아직 진행 중이다. 말줄임으로 그것을 대신하고자 한다.
다시 코로나19
엄마의 마침표를 다시 말줄임으로 끌어낸 건 내일이 아빠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되도록이면 최소한의 인원과 최소 격식의 상차림으로 그를 애도할 것이다. 그녀의 마침표는 여전히 마침표가 아닌가 보다. 지난 시간이 새로운 위로를 해 준다. 그를 애도하는 마음만은 크게 하고 싶은 욕심에 좀 더 크고 좋은 것, 많을 것들을 요구한다. 물론, 그녀의 정리되지 못한 마침표를 조심히 다듬어 주려고 한다. 깊은 맘으로 애도하지만 그 후에 조용히 설 수 있도록.....
코로나19 또한 우리들의 더 깊은 관심과 서로를 위한 각자의 위치에서의 지킴과 배려를 통해 반드시 마침표를 찍으리라 기대한다. 제대로 된 위드 코로나로의 마침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