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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밀도

기억과 애도의 방식

by 무 한소

#애환(09)


일방적인 위로를 하는 가까운 친지나 주변인들이 감사하면서도 미웠다. 수애는 자신만이 겪는 삶의 최악의 슬픔을 그들이 걱정하면서도 그녀를 염탐하러 왔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걱정하는 그들의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지면서도 피하고 싶다는 양가의 감정이 공존했다. 그런 불편한 부정적 감정을 안고 수애의 시간은 다시 흘러간다.

긴 시간 그녀를 괴롭히는 불편함은 계속되었다.

수애는 어떤 위로도 받지 못했으며 숨 한번 편안하게 쉴 수도 없었다. 아픔이 더 큰 아픔이 되어 그녀의 모든 생활에 침범했다. 주변을 가득 채운 봄을 바라보며 즐기면 안 될 것 같았고 편안하게 침대에서 잠을 청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또, 슬픔이라는 이 감정이 지속되는 한 배가 고플 거 같지는 않았다. 수애는 우리 인간의 삶을 너무나 만들어진 이상으로만 생각해 왔던 걸까. 그 기준이 무너진 건 죽음이라는 상황과 바로 맞닿아 있었다.


현실을 깨닫게 한 건 아이에게 이별을 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고프다는 것을 인식하고부터였다. 삶을 지탱하려면 먹고 자야 한다는 경고가 그녀의 뇌를 강하게 때리듯 현실은 그녀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동물적 본성은 자식을 보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오는구나.' 마치 먹고 자야 살 수 있다고 그녀는 자신을 책망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본능까지 합리화해 보았다.


이후 삶을 잘 적응해 나가는 방법으로 현실에 자신의 몸을 다시 정신없이 혹사했으며 주변 사람들의 눈빛에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타자의 눈빛은 시간이나 대상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주변이나 타자에 대해 항상 가혹한 평가를 했다. 이제는 익숙할 법도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그 상황이 힘이 들고 위로받지 못한 마음과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눈빛이 다른 이에겐 그저 무덤덤하게 스쳐 지나가는 무심함으로 느껴질 때 그 눈빛에 더 큰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는 선택했다.

지독하고 처절하게 혼자가 되어 살아가기로.

서로를 배려한다는 마음으로 남편과도 그때부터 아픈 서로에게, 서로의 감정에 무기력하려 애썼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이제 아이는 그들 곁에 없다. 언제부턴지 남편은 자주 술(알코올)에 의지해오고 있었다. 뭔가 이겨야 하는 상황이 되면 매 번 술과 치킨을 함께 시켰다. 수애는 드러내지 않은 남편의 마음을 읽으며 또 한 번 소리 죽여 울어야 했다. 남편은 아마도 민이가 좋아했던 치킨을 시키면 아이와 함께했던 시간의 추억이 떠오르고 보상받지 못한 가족의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을까 싶었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셋이 함께 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딱 한 번만이라도 민이와 마주하고 웃고 아이를 만질 수 있는 순간을 고대했으리라.


수애가 일을 끝내고 귀가하던 어느 날, 남편의 모습과 그를 둘러싼 그 순간 에너지가 심상치 않았다. 남편은 붉은색의 반 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이가 두 사람 곁을 떠난 특별했던 날 이후로, 항상 굳어있던 표정과는 달리 예전의 앳되고 상기된 에너지의 모습이 슬쩍 비쳤다. 순간 수애는 살짝 설렜다. 열정과 에너지가 결혼하기 전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의 모습이었고 결혼 후 지쳐버린 남편의 모습과는 대조될 만큼 다채로운 색으로 강하게 다가왔다. 사실 지금의 다양한 에너지는 남편의 단점을 대부분 가려줬다. 남편은 귀가하던 수애와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손짓했다. 귀갓길 그녀를 따라 들어온 치킨을 받으러 남편이 일어서더니 수애 곁으로 다가왔다. 마치 퇴근하는 그녀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것처럼. 수애는 남편의 모습이 내면을 감추기 위한 과장된 표현과 동작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모른 척 남편을 안아 주겠다 조용히 다짐했다. 수애 자신또한 좀 과한 듯 보여도 내면을 그대로 표출하겠다고.


남편은 바통을 넘겨받듯 치킨을 받아 들었고 한 손에는 치킨을 다른 한 손으로는 수애를 잡아끌었다. 그녀에게 연거푸 앉으라며 손수건을 건넸다. 어리둥절한 수애는 표정을 가리고 희미하게 웃으며 붉은 스카프를 어색하게 둘렀다. 남편이 먼저 소리 내어 응원을 시작했다. 한동안 억누르기만 했던 감정을 토해내듯 남편이 지르던 소리를 따라서 수애도 소리쳤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응원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애환을 응원으로 위장한 뒤 세상 밖으로 온전히 토해낸 것 같았다. 수애는 가슴 깊이 걸려있던 응어리를 끌어올려 내질렀다. '이렇게 시원한걸 그동안 왜 참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성향, 성품이 갑자기 너무나 답답했고 이어 화가 치밀었다. 동시에 지금 자기에게 기회를 준 남편이 너무나 고마웠다. 마치 수애의 마음을 읽어 왔다는 듯 다 쏟아내고 뱉으라고 기회를 만들어 준 남편에게 사랑의 다른 또 모습인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이 겪은 상실감은 같은 것이기에 내 그 마음 누구보다 잘 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남편은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열심히 쫓았고 격하게 그 자리에 합세했다. 그리고 한 번씩 토해내듯 격렬하게 소리치는 수애를 힐끗 쳐다본다. 남편이 권하는 술도 한잔했다. 더 마시면 지금껏 지켜왔던 감정을 다시 조절하기 힘들어질까 염려가 되어 한 잔에서 멈췄다. 그러다 남편이 갑자기 격앙된 표정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갈라지는 소리를 끌어내어 겨우 말했다.


남편과 수애의 시선이 그제야 드디어 만났다. 민이가 두 사람 곁을 떠난 날 이후 두 사람은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했으며 서로의 눈을 집중해서 쳐다볼 수 있었다. 남편이 갈라지는 소리에 힘을 주어 말한다. 다음에 있을 월드컵 경기는 광장이나 사람들과 소통하며 길거리 응원을 할 거라고.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남편의 들뜬 목소리와 축구를 좋아했던 민이가 불현듯 겹치자 그녀는 순간, 방금 남편의 소리로 나온 다짐이 기다림의 의지로 터져 나온 아이의 빙의가 아닐까 착각했다. 사실, 수애는 주변에서 이러한 현상을 두고 그녀의 망상이라고 할까 봐 섣불리 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수애는 남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이와 남편은 자주 축구공을 가지고 놀고 놀이 가운데서 소통하는 것을 즐겼다. 수애가 잘 모르는 자기들끼리의 비밀스러운 제스처를 해가며. 대부분 그 자리에는 수애가 함께 했지만 둘 사이의 움직임에는 그녀가 소외된 둘만의 공감대가 분명 존재했었다. 지금은 추억이라 떠올리는.


감정적으로 아픔을 지닌 그런 기억으로 남편은 민이와 함께한 순간을 잊으려는 걸까, 더 정확하고 또렷하게 기억하려는 걸까. 수애가 보기에 남편의 열정과 냄비처럼 불타오르는 감정 너머에는 민이와 함께한 시간을 제대로 기억하고 다시 잊기 위한 자신만의 애도의 방식이 있었다. 그렇게 그의 마음이 이해되자 신뢰는 곧 확신으로 이어졌으며 수애도 길거리 응원에 동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의지를 듣자 남편의 입가에 아련한 듯 과거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누군가에게 이 시도는 아주 사사로운 일일수 있으나 남편과 수애 사람에게는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 안될 만큼 큰마음이고 큰 시도였다.


이제 수애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려고 한다. 남편이 삶을 사는 모습과 수애의 걸음이 같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걷는 길은 평행으로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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