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시간 앞에서
제각각인 아이들의 시간을 이해한다는 건 오만일까
교실에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의 시간을, 나는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같은 교실, 같은 시간표, 같은 시험, 방학 일정 안에 있지만 아이들의 시간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한 문제에 오래 머물고, 누군가는 이미 지나간 시험 시간과 결과에 아직 갇혀 있고,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그다음을 포기하기도 한다. 나는 종종 아이들을 이해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마음을 알고 싶다고, 시간을 읽고 싶다고.
그런데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건 이해가 아니라, 오만은 아닐까. 아이들의 시간은 예측할 수 없다. 같은 설명을 듣고도 어떤 아이는 이해하려고 하고 어떤 아이는 관심조차 없다. 씁쓸하게도 어떤 아이에게는 그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학원을 다니는 것조차 목적이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듯이. 그 또한 이해한다.
어른의 시간과 언어로는 아이들이 사는 그 세상의 속도를 가늠할 수 없다.
나는 수시로 말한다.
“이젠 알 때도 됐잖아.”
“이젠 진심이 닿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이들의 시간에는 ‘이제’라는 기준이 없다. 그건 어른의 시간에 있는 단어일 뿐이다.
방학이라 매주 테스트가 있다. 시험을 앞두고 유난히 말이 없어진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눈을 마주치면 웃지만, 아이에게 웃음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나는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괜찮아?”
아이의 대답은 늘 비슷하다.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한다든가 “몰라요, 괜찮아요.” 하든가.
진짜 괜찮아서인지, 더 이상 설명할 언어가 없어서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알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시간을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 시간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일,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때론, 기다림이 가르침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아이들의 시간을 대신 살아주는 일이 아니라, 각자의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교실에는 각자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앞서가는 시간, 가끔 멈춘 시간, 아직 시작되지 않은 시간까지. 나는 그 모든 시간을 온전히 이해하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 곁에 조용히 머무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