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렬의 회화 읽기
《작품 No. 22》는 일반적인 감상자를 압도하는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고요한 작품이다. 화면은 구체적 형상이나 요란한 조형 요소 없이, 검푸른 물감과 물감 방울이 터진 흔적 15개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 화면에는 검푸른색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화가는 넓은 붓을 천천히 움직이며 캔버스를 균일하게 덮는다. 얼핏 보면 검은색으로 착각될 만큼 짙은 남색이 화면 전체를 촘촘하게 채우고 있다. 붓질이 겹쳐진 부분만이 약간 더 어두울 뿐, 매끈하고 반드러운 색면은 하나의 평면 회화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조명을 받으면 은은한 광택이 일어나고, 그제야 붓이 지나간 자취가 미세하게 드러나며 고요한 화면에 생기가 돈다.
화면에는 수직 방향으로 두 개의 세로선이 있어 화면을 삼등분하며, 그 선 위에 물감 방울의 흔적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이 방울들은 마르기 전의 물감을 화가가 눌러 터뜨린 자국으로, 대개 주먹 크기 정도의 동그란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물감이 튀거나 흘러내린 자국은 보이지 않지만, 방울의 중심은 캔버스에 밀착되어 말라붙었다. 이 흔적들은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각기 다른 표정과 궤적을 지닌다. 만약 화가가 일정한 간격과 순서로 방울을 배치했다면, 지금 보이지 않는 ‘사라진 방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상자는 오직 살아남은 흔적만을 마주한다.
왼쪽 세로선에는 아홉 개의 방울 흔적이 있다. 감상자는 세로가 긴 화면의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레 시선을 움직이게 된다. 첫 번째 방울은 세로로 길게 찢어진 타원형이다. 붓으로 눌러 터뜨린 자국이 겹겹이 쌓여 입체감을 지닌다. 두 번째 방울은 비교적 동그란 형태로, 왼쪽 하단으로 약간 쏠려 있다. 세 번째 방울은 앞의 두 배 크기로, 표면 일부가 벗겨져 어둠이 스며든다. 네 번째는 물감 튜브를 눌러 짜낸 듯 납작하게 눌려 있고, 물감이 윗부분으로 튀어나온 듯하다. 다섯 번째는 거의 화면과 융합되어 흔적만이 엷게 남았다. 마치 잠시 존재했음을 증명하듯, 배경 색이 지워진 자리만이 남아 있다. 여섯 번째는 파열된 껍데기가 구겨진 채 붙어 있고, 그 아래에는 밝은 파란색의 원형 흔적이 남아 있다. 어둠을 걷어내야만 드러나는 눈부신 푸른빛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일곱 번째는 거칠게 터졌으며, 여덟 번째는 화산의 분화구처럼 중앙이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아홉 번째는 형상조차 사라졌고, 물감이 살짝 닦인 자국만이 남는다.
오른쪽 세로선에는 여섯 개의 방울 흔적이 있다. 첫 번째는 이미 배경에 흡수되어 주름진 껍질 일부만 남아 있다. 두 번째는 납작하게 눌렸지만 가장 온전한 원형을 보인다. 세 번째는 마르기 전 중력에 의해 아래로 흘러내렸고, 지금은 수축된 물감 껍질만이 붙어 있다. 네 번째는 약간 찌그러졌지만 방울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다섯 번째는 쭈그러들며 주름진 형태고, 여섯 번째는 배경의 색을 지워내며 존재를 드러낸다.
이처럼 화면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두 줄 위의 방울들은 각기 다른 형상으로 존재한다. 어떤 것은 원형을 유지하고, 어떤 것은 찢어지고, 어떤 것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나의 ‘사건’의 결과물이다. 감상자가 마주하는 조형 요소들은 더 이상 물감 방울이 아니다. 터지는 순간도, 마르는 과정도 아니다. 그것들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물감의 잔해이며, 흔적이다.
과정을 이해한다면 이들을 ‘흔적’으로 볼 수 있지만, 결과만 본다면 이는 단순한 불순물, 캔버스에 남겨진 결함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흔적들이 무엇이든, 이 화면에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 조용하게 남겨진 자취일 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이 고요한 작품이 품고 있는 유일한 목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