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의 회화 읽기
사람 키만 한 크기의 캔버스 위에 수직과 수평 방향으로 고르게 주황색 물감이 칠해져 있다. 붓이 지나간 자리는 거친 자국을 남기지 않고, 희미한 덧칠의 얼룩만이 그 흔적을 남긴다. 차분하게 평평하게 칠해진 이 화면은 회화라기보다는 거대한 주황색 벽을 마주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조명을 받은 표면은 은은한 광택을 반사하며 부드럽게 빛난다. 그러나 이 화면을 채운 주황색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떠올리는 활기차고 상큼한 주황색과는 다르다.
보통의 주황은 잘 익은 과일이나 햇살 아래의 따뜻함을 연상시키며 명랑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제사》의 주황색은 어둡고 탁하다. 색조는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고, 주변의 흰 벽과 강하게 대비되어 감상자를 압도한다. 그 무게감은 단지 색감 때문만은 아니다. 네 귀퉁이에서 스며드는 검붉은 기운이 화면을 조용히 잠식하며, 시선을 중앙으로 끌어당기고 화면 전체에 어두운 정서를 불어넣는다.
작품에는 보조적인 장식이나 배경이 없다. 오직 화면을 관통하는 세 개의 조형 요소만이 존재한다. 왼쪽 상단과 오른쪽 상단에는 마치 좌우 대칭을 이루듯 비슷한 형상이 있다. 화가는 두 곳에 검은 물감을 툭 얹은 뒤, 그것이 어느 정도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마른 붓으로 물감을 으깨어 퍼뜨렸다. 표면에 흡수되지 못한 물감은 그 자리에 머무르며, 주변에 얇게 번져간다. 그 위에 다시 몇 겹의 검은 물감을 덧입혔고, 마지막 칠에서는 미세하게 흰 물감이 섞인 흔적도 보인다. 평평한 화면 위에서 질감을 드러내는 이 물감의 점은 시선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굳지 않은 검은 물감은 퍼져나가며 얼룩을 남긴다. 화가는 그 물감을 크지 않은 붓에 묻혀 천천히 원을 그리며 화면에 얹는다. 점은 주변으로 퍼지며 크기를 키우고, 주황색 바탕과 섞여 어두운 얼룩을 만든다. 붓은 수직과 수평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오가며, 마티에르가 남지 않도록 두께를 조절한다. 검은색 점은 이내 수직의 선으로 이어진다. 검은 물감이 거의 마를 즈음, 화가는 붓을 아래로 길게 내리긋고 다시 위로 올리기를 반복한다. 양쪽에 대칭적으로 생겨난 두 점과 두 선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지는 않지만 같은 제스처에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한다.
이 두 선 아래에는 또 하나의 조형 요소가 등장한다. 건조한 붓으로 칠한 듯한 검은 직사각형이다. 좌우로 오간 붓질이 남긴 자국은 붓의 결만 남긴 채 거칠게 표현되어 있다. 마티에르는 거의 없이, 검은색이 짙게 칠해진 그 중심부에는 노란빛이 살짝 섞인 흰색 물감이 가로로 길게 얹혀 있다. 습기를 잃은 붓에서 짜낸 듯한 텁텁한 질감이 이 선을 물감이라기보다는 얹힌 형상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렇게 구성된 점, 선, 면의 조형 요소는 단순한 형태이지만, 감상자는 이 작품을 단순한 기하학적 추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색채와 제스처, 질감이 불러오는 감정의 여운 때문이다. 어두운 주황색, 처연하게 스민 검은 얼룩, 건조한 붓의 흔적은 감상자에게 묘한 정서를 환기시키고, 어느새 우리는 이 화면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
화면 위 조형 요소들은 마치 하나의 얼굴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점은 눈이 되고, 선은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 그리고 흰색으로 얹힌 선은 굳게 다문 입으로 보인다. 이 얼굴은 고통을 외치지 않는다. 침묵하며 조용히 눈물 흘리는 얼굴이다. 활활 타오르거나 날카롭게 찢긴 듯한 많은 앵포르멜 회화와 달리, 이 작품은 고요한 슬픔, 말없이 삼킨 감정을 전달한다. 그렇게 감상자는 이 작품을 바라보며 ‘단순한 조형’이 아닌 ‘무언가를 참는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앵포르멜에서 '얼굴'이 갖는 의미는 전통적인 초상화와는 다르다. 전통 회화에서 얼굴은 개별 인물의 정체성, 감정, 사회적 지위를 전달하는 주요 매개였지만, 앵포르멜 미술에서 얼굴은 그러한 구체적 표상에서 벗어나 더 근원적이고 비물질적인 차원으로 해체된다.
전후의 혼란, 인간성 상실, 언어와 질서에 대한 불신 속에서 등장한 앵포르멜에서 얼굴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기 보다 익명의 인간성 혹은 존재 그 자체를 드러내는 흔적이다. 흐릿하게 왜곡된 주황색 얼굴은 인간 내면의 불안과 원초적 감정을 구현한다. 상처와 파괴의 흔적을 품은 표면으로서 얼굴은 인간이 얼굴을 잃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