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각의 심연

김종학의 회화 읽기

by 말하는 돌

《작품 603》은 매끈하게 다듬지 않은 시멘트 위에 그려진 것처럼, 거칠고 투박한 표면이 인상적이다. 미술관 조명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택 하나 없이 텁텁하고 까슬까슬한 질감이 살아 있다. 가로로 긴 직사각형 캔버스 위에는 엷은 회색 물감이 두텁게 칠해져 있으며, 그 위로 붓의 궤적이 방향 없이 흩어져 있다. 직선이 상하좌우로 횡단하다가 어느 순간 곡선으로 굴절되며, 일관된 리듬 없이 변주를 반복한다. 매캐한 화면 속에, 뚜렷하지 않으나 어렴풋이 형상처럼 느껴지는 무언가가 등장한다.


화면 중심부에는 하얀 물감을 듬뿍 머금은 붓으로 빠르게 그린 두 개의 타원이 있다. 마치 한 번에 그어낸 듯한 붓자국에는 속도감이 묻어나며, 때로는 붓 뒷부분이나 뭉툭한 막대로 표면을 긁어내듯 흔적을 남긴다. 그 아래에는 세로축을 중심으로 짧은 가로선 세 개와 검은색 동그라미 하나가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이 축은 정확히 수직을 이루지 못한 채 왼쪽으로 기울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가늘고 짧은 선들과 굵고 긴 선들이 무질서하게 뒤얽혀 있다. 두꺼운 물감이 건조한 갈필(渴筆)로 표현되어, 선 하나하나가 분명하게 인지되지는 않는다.


왼쪽 아래에서 시작된 굵은 직선 하나는 타원을 향해 급격히 솟아오르다, 다섯 번 꺾이며 진행 방향을 바꾼다. 처음의 꺾임은 붓의 방향 전환 흔적만 남겼지만, 다음 지점부터는 접힘을 감추려는 듯 짧은 선이 반복적으로 덧대어진다. 선은 타원에 거의 닿을 듯 다가가지만, 다시 왼쪽 하단을 향해 주춤하다 이내 오른쪽 하단으로 빠르게 내려간다. 선의 끝자락에는 작은 흰색 점이 그려져 있고, 붓의 속도감에 따라 직선은 점점 가늘어지며 희미한 자국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형성된 중앙부의 선들은 정돈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어 명확한 형상을 읽기 어렵다. 더욱이 화가는 물감이 마르기 전에 뭉툭한 도구로 또 다른 형상을 덧그린다. 하지만 그것은 기존의 붓질을 따라간 것도 아니고, 모든 부분을 다시 그린 것도 아니다. 하나의 색으로 칠해진 배경과 달리, 이 영역은 여러 조형 요소가 뒤엉켜 전후 맥락이나 인과 관계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다만 검은색과 흰색의 강한 대비에 의해 희미하게 형상이 드러날 뿐이다. 흑과 백의 대비는 고전적으로는 선과 악, 존재와 부재의 대립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이 화면에서는 그런 상징조차 지워진 채, 단지 ‘명암의 운동성’만이 남아 있다.


이 흰색 선의 위치나 굴절, 길이 등을 주의 깊게 보면, 마치 엑스레이로 촬영한 두 인물의 전신 골격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등을 맞댄 채 바닥에 앉아 다리를 일자로 뻗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골격처럼 보이는 하얀 선은, 살아 있는 육체가 아닌, 존재의 껍질만이 남은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살아있지만 죽은 듯한 상태, 혹은 고립된 자아의 환영일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얀 선을 둘러싼 짙은 어둠이다. 타원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검은 물감은 마치 파동처럼 겹겹이 번지며 배경의 회색과 뒤섞인다. 붓질은 반복된 원형을 남기며 물감이 퍼져나가는 형상을 시각화한다. 아래쪽 겹쳐진 선들 주변에도 마찬가지로 짙은 어둠이 자리하며, 하얀 선을 따라 회색 바탕으로 짧은 선들이 퍼져나간다. 마치 하얀 형상에서 어둠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인상을 준다.


회색 배경 위를 향해 사방으로 확산된 어둠의 그라데이션은 정돈되지 않은 채 날 것으로 남겨져 있다. 화가는 명도 차이를 섬세하게 조절하기보다, 거세게 어둠을 뿜어내듯 표현하고자 했던 듯하다. 특히 하단부에는 높이가 낮은 사다리꼴 형태로 칠해진 가장 짙은 검은색 면이 있다. 이 어둠은 화면의 중심 형상을 떠받치고 있지만, 결코 안정감을 주지는 않는다.


이 작품은 흑과 백, 두 가지 색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한된 색채의 사용은 표면의 황폐한 질감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특별한 재료 없이도 이 작품의 물질성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감상자는 색채의 온도, 상징, 이야기보다는 표면의 건조한 질감에 몰두하게 된다. 불투명한 물감이 두껍게 쌓이거나 휘저어져 뒤엉키면서, 화면은 험하고 삭막한 질감을 드러낸다.


이러한 촉각적 인상은 감상자로 하여금 공간의 물리적 척박함, 정서적 무미건조함을 상상하게 한다. 감정의 격동보다는 감각의 무딤, 혹은 감각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되는 경험.《작품 603》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감상자의 시선을 붙잡고, 말 없이 거친 공간의 표면을 응시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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