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베다

인간의 잠재성

by 말하는 돌
“제우스의 따님이여, 전쟁과 결전에서 물러서십시오.
연약한 여자들을 속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대가 앞으로도 싸움터를 찾을 작정이시라면,
이제는 아마도 멀리서 전쟁의 소음만 들어도 무서워 떨게 되실 것입니다.”
― 『일리아스』 제5권, 348~351행


트로이 전쟁의 한가운데서, 디오메데스는 아테네 여신의 축복을 받아 신과 인간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얻는다. 그녀는 단 하나의 예외를 남긴다. 불멸의 존재와는 맞붙지 말되, 아프로디테만은 공격할 수 있다는 명령. 전장 속에서 디오메데스는 그 지침을 따르고, 아이네이아스를 구하려 달려든 아프로디테의 손목에 창끝을 꽂는다. 그리고 위의 구절처럼 조롱을 섞어 그녀를 몰아낸다. 이는 단순히 한 전사의 무훈에 머무르지 않는다. 신과 인간의 위계가 흔들리는 순간, 인간이 신에게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전례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미의 여신이다. 그러나 이 전쟁의 시작을 촉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을 조장한 그녀는, 인간의 세계를 파국으로 몰아넣은 ‘감정’의 힘을 구현한다. 그 앞에서 디오메데스는 “연약한 여자들을 속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냐”라고 꾸짖는다. 이는 단순한 전투의 대사가 아니라, 인간이 신을 향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드문 순간이며, 신과 인간의 관계가 단지 수직적 위계로만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충돌은 곧 인간 내면의 갈등을 상징한다. 디오메데스가 아테네의 가호 아래 이성과 질서를 대표한다면,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욕망이라는 본능을 대변한다. 이성 대 본능, 질서 대 혼돈. 그들의 대결은 인간 내부에서 끊임없이 맞부딪히는 두 힘의 은유이다. 결국 신은 인간의 내면을 외화한 존재라 할 수 있으며, 디오메데스의 투창은 자기 안의 감정을 제어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적 의지를 형상화한다.


이 장면에서 신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디오메데스의 창끝에 피를 흘린 아프로디테는 올림포스로 물러나며, “이제는 그리스인과 트로이인의 전쟁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전쟁이 되어가고 있다”라고 탄식한다. 신과 인간의 경계가 흐려지고, 인간이 때로 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아프로디테는 전장에서 무력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전사의 세계에서 배제되고, 전투의 논리 앞에 힘을 잃는다. 이는 곧 본능적 충동이 인간의 생존과 충돌할 때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 반대로, 그 순간 디오메데스는 자기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의 명령을 따른다. 바로 그 행위가 신을 제압하는 인간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내부의 힘이다. 신은 인간이 투사한 그림자이며, 인간은 그 그림자를 넘어 자기 자신과 맞선다. 디오메데스의 창끝이 아프로디테의 살을 가른 순간, 신과 인간의 위계는 무너지고, 인간은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힘을 발현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그 힘은 외부의 초월적 신이 아니라, 오직 인간 내면의 의지와 결단에서 길어 올려진 잠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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