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전통을 바라보는 법

<올해의 작가상, 김지평>

by 말하는 돌

김지평의 회화 앞에서 우리는 종종 익숙한 질문을 미루게 된다. 이것은 동양화인가, 현대미술인가. 전통의 연장인가, 해체인가. 그의 작업은 이 질문들이 얼마나 성급했는지를 조용히 드러낸다. 김지평에게 전통은 계승해야 할 대상도, 극복해야 할 과거도 아니다. 그것은 비어 있기 때문에 다시 쓰일 수 있는 공간이며, 침묵했기 때문에 더 많은 목소리를 품을 수 있는 서사적 장이다.


그의 작업은 동양화의 형식을 하나의 닫힌 기술 체계로 다루지 않는다. 산수, 풍속, 병풍, 책가도와 같은 전통적 형식은 김지평에게 언제나 가변적이다. 그것들은 특정 시대의 권력, 욕망, 시선이 겹겹이 덧칠된 결과물이며, 따라서 다시 벗겨지고 재배치될 수 있는 구조다. 그는 전통을 ‘이미 있었던 것’으로 존중하는 대신, ‘없어졌다고 믿어온 것’을 호출하는 방식으로 다룬다. 이때 회화는 재현의 장이 아니라, 상실된 가능성을 실험하는 무대가 된다.


〈Polyphonic Chorus〉(2023–2025) 연작에서 병풍은 단일한 화면이 아니라, 분절된 목소리들의 배열로 기능한다. 병풍의 각 폭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기녀, 무당, 할머니와 같이 역사 속에서 주변화되어 온 존재들이다. 이들은 중심 서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지만, 결코 침묵 속에 있지 않았다. 김지평은 병풍의 구조—각 폭이 독립적이면서도 하나의 장면을 이루는 형식—를 통해 이들의 목소리가 동시에, 그러나 완전히 합쳐지지 않은 채 울리도록 만든다. 시각적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이 앞에서 어떤 청각적 환영을 경험한다. 들리지 않던 목소리들이 침묵 속에서 겹쳐지는 순간이다.


이 작업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병풍의 명칭과 여성 한복의 구성이 닮아 있다는 작가의 발견이다. 이는 단순한 형식적 유사성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여성과 이미지가 어떻게 접히고 펼쳐지며 관리되어 왔는지를 암시한다. 김지평은 이 유사성을 통해, 전통적 매체 자체가 이미 젠더화된 구조였음을 드러낸다. 병풍은 더 이상 배경이나 장식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존재들이 등장하는 무대가 된다.


김지평은 ‘동양/서양’, ‘전통/현대’라는 구분이 이미 무의미해진 상태에서 작업한다. 그의 초기 연작들이 보여주듯, 숭문주의의 상징이던 책거리는 현대 여성의 유희 공간으로 전환되었고, 산수화는 군사적 카무플라주와 결합해 개발과 냉전의 풍경을 동시에 품었다. 그는 전통을 현대의 반대항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과 현대가 이미 혼종의 상태로 얽혀 있음을 전제로, 그 사이의 균열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그가 말하는 ‘재야의 미술’은 공식 미술사에 포함되지 못한 존재들의 잠재적 서사다. 문헌의 주변부, 민화와 신화, 소설과 영화에서 소환된 인물들은 그의 화면 안에서 동시대와 조우한다. 이 만남은 매끄럽지 않다. 혼란과 충돌, 좌절이 발생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화의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난다. 김지평에게 전통의 단절은 애도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쓰기를 요구하는 상태이며,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공백이다.


그의 작업은 우리에게 말한다. ‘없는’ 전통을 보라고. 이미 사라졌다고 믿어온 자리, 기록되지 않았다고 여겨온 틈새를 응시하라고. 그곳은 비어 있기에 열려 있고, 침묵했기에 더 많은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김지평의 회화는 그 틈새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가 재구성한 동양화는 더 이상 과거를 보존하는 장르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하나의 시선이 된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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