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을 위하여

보통의 영웅, 트뤼가이오스

by 말하는 돌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평화』는 시작부터 해학과 익살로 관객을 맞이한다. 무대 위에 펼쳐진 것은 숭고한 서사시의 장엄함이 아니라, 똥 케이크를 빚는 소동이다. 트뤼가이오스의 하인들은 쇠똥구리에게 먹일 똥 덩어리를 만들어내며, 냄새와 모욕, 과장이 뒤섞인 희극의 활기를 한껏 뿜어낸다.


“저 녀석은 더럽고 냄새나고 게걸스러운 녀석이야.
어떤 신이 저런 재앙을 우리 집에 보냈는지 알 수 없단 말이야.
아프로디테나 카리스 여신들이 보내지 않은 것은 확실해.”
(『평화』 38~41행)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들이 불러오지 않은, 천한 벌레의 등장은 극적 대조를 이루며 웃음을 자아낸다. 동시에 이는 작품 전체의 반전 구조, 고귀한 주제가 가장 천박한 장치로 풀어지는 전복의 유머를 미리 암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하인은 주인 트뤼가이오스가 “쇠똥구리를 나의 페가소스로 삼아 제우스를 찾아가겠다”고 선언하자, 그를 정신 나간 광인으로 비웃는다. 그러나 그의 여정은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것은 제 아비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의 절박한 호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너희도 짐작하겠지만, 내 딸들아, 사실 나는 무척 괴로웠단다.
너희가 나를 ‘아빠’라고 부르며 밥을 달라 조를 때
집 안에 돈 한 푼 없을 때 말이야.
내가 성공해서 돌아오면 너희는 곧 큼직한 빵 덩이를 얻고,
양념으로 알밤도 한 대씩 먹게 될 거야.”
(『평화』 120~123행)


트뤼가이오스의 언어는 전쟁의 피비린내가 아니라, 아이들의 식탁에서 흘러나오는 배고픔의 신음이다. 그에게 영웅의 과업은 전장의 피가 아니라, 집안의 빵과 알밤이다. 그의 용기는 피를 흘리지 않는 대신, 가족과 이웃을 위해 웃음을 짓게 하는 희망으로 드러난다.


『일리아스』 속 영웅들이 불멸의 이름을 위해 싸웠다면, 트뤼가이오스는 평범한 농부로서 평범한 행복을 위해 싸운다. 그 보통의 삶을 지키려는 고집과 소망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고도 숭고한 용기 아닐까. 나는 오히려 그 평범함 속에서 진정한 영웅을 본다.


그의 여정은 신들의 궁전 문 앞에 닿는다. 그러나 그곳에서 들은 것은 충격적인 소식이다. 신들은 인간 세계를 버렸고, 지금은 ‘전쟁’이 권력을 움켜쥐었다는 사실. 평화는 깊은 구덩이에 갇혀 있고, 전쟁은 헬라스의 도시들을 절굿공이에 넣어 빻아 없애려 한다.


“아테나이인들은 절굿공이를 잃어버렸어요.
온 헬라스를 쑥대밭으로 만든 가죽 장수 말예요.”
(『평화』 272~273행)


이 대사는 전쟁을 통해 이득을 취하던 자들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전쟁 상인들이 잃은 것은 절굿공이일 뿐이지만, 농부들이 잃은 것은 삶 그 자체였다. 트뤼가이오스는 바로 이 틈을 붙잡는다. 그는 동료 농부들과 함께 밧줄을 당기며 구덩이에 갇힌 평화를 끌어올리려 한다. 전쟁으로 배를 불리던 자들이 거슬러 밧줄을 잡아당기지만, 결국 밀려난다. 오직 농부들만의 손으로 ‘평화’, ‘풍요’, ‘축제’가 세상으로 돌아온다.


전쟁에서 손해 본 자들과 이익을 취한 자들의 희비는 극명하게 갈린다. 전쟁 상인들은 울부짖지만, 농부들은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여신 평화는 트뤼가이오스에게 풍요와 축제를 선물하고, 희극은 결혼식의 환희 속에 끝을 맺는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웃음을 빌려 가장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평화란 무엇인가? 영웅이란 누구인가? 트뤼가이오스는 칼을 든 전사가 아니다. 그는 땀 흘려 땅을 일구는 농부이고, 자식에게 빵을 먹이고 싶어 하는 아버지이며, 전쟁 대신 축제를 꿈꾸는 한 인간이다. 바로 그 보통의 삶을 위해 나아가는 그의 발걸음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이고, 희극이 말해주는 ‘보통의 영웅’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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