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을 삼키다

허기의 은유, 에뤼식톤의 파멸

by 말하는 돌
“그에게는 음식이 곧 음식을 먹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
먹을수록 늘 공복감을 느낄 뿐이었소.
그의 중병이 더 많은 먹을거리를 요구하게 되자,
그 가련한 자는 제 사지를 찢어 그것을 제 입으로
물어뜯기 시작하더니 제 몸을 먹음으로써 제 몸을 먹였소.”
— 『에뤼식톤과 그의 딸』, 841행, 842행, 876행, 878행


케레스(데메테르) 여신의 분노를 산 에뤼식톤의 최후는 그로테스크하다. 그는 신들에게 제의를 드린 적 없는 불경한 자였고, 여신이 사랑하던 요정이 깃든 신성한 참나무마저 주저 없이 베어 쓰러뜨렸다. 나무에서 흘러내린 피와 함께 요정의 저주가 그의 운명을 짓눌렀고, 요정의 자매들이 케레스에게 정의를 호소하자 여신은 그에게 ‘허기’라는 형벌을 내렸다. 그때부터 에뤼식톤은 끝없는 공복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그에게는 음식이 곧 허기의 원인이 되었고, 먹을수록 더욱 굶주렸소.”


허기는 그를 무너뜨렸다. 먹어도 먹어도 공허만이 남았다. 재산은 모두 바닥났고, 마침내 그는 하나뿐인 딸마저 팔아넘겼다. 딸은 신의 도움으로 변신의 능력을 얻어 달아나지만, 에뤼식톤은 그 능력마저 이용해 그녀를 반복적으로 팔아먹었다. 종국에는 더 이상 외부에 먹을 것이 남지 않았을 때, 그는 자기 몸을 찢어 뜯으며 스스로를 삼켰다.


이 참혹한 이야기를 읽을 때 떠오르는 단어는 단연 ‘욕심’이다. 케레스의 형벌은 단순한 배고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끝없는 결핍, 스스로를 불려가는 탐욕의 은유였다. 여신은 그를 단순히 파멸시키려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가장 원초적인 고통, 허기를 통해, 그의 죄를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잔혹한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왜 하필 ‘허기’였을까? 에뤼식톤은 본래부터 불경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여신은 그에게 낯선 고통을 주입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지니고 있던 결핍의 감각을 극대화했을 뿐이다. 욕망의 구덩이를 끝없이 파내려가게 만들고, 만족의 능력을 완전히 빼앗아버린 것이다.


사전은 욕심을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욕심은 반드시 악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목표를 향한 추진력이자, 성취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욕망이 타인과 자신을 파괴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과도한 욕심’이라 부른다. 에뤼식톤의 허기가 바로 그러한 욕망의 초상이다. 그는 만족을 알지 못했고, 끝내 자기 살을 갉아먹으며 사라졌다.


『팔만대장경』에는 “욕심은 만족을 모르는 불가사리”라는 구절이 있다. 불가사리는 잘라내도 다시 돋아나는 괴물이다. 욕망도 마찬가지다. 내면의 작은 결핍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은 점점 자라나 결국 주인을 삼키는 괴물이 된다.


에뤼식톤의 비극은 단지 신의 형벌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욕망이 외화된 거울이다. 케레스가 그에게 ‘허기’를 심어준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존재하던 허기의 크기를 끝없이 불려놓았을 뿐이다.


욕망이란 본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자각하고 제어할 때에만, 우리는 그 불가사리가 되어버린 결핍에 삼켜지지 않는다. 에뤼식톤은 그것을 다스리지 못해 스스로를 파괴한 자였다. 그의 허기는 결국 인간 내면에 도사린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잔혹한 운명을 보여준다.

이전 18화빵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