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혹시 **라고 알아?

by 말복


딱히 숨기려고 숨긴 건 아니지만 어디 가서 말하긴 어려운 오늘의 이야기는 '서브컬쳐' 입니다. 아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저는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로 전학을 왔어요. 안 그래도 내성적인데 그날 같이 전학을 온 다른 반 친구가 정말 예뻤어요. 다른 반에서도 남자애들이 우르르 구경 갈 만큼요. 전학 첫날 일찍 도착한 저는 일단 반에 들어가 앉아 있었는데, 그날 남자애들이 와르르 몰려왔다가 제가 아닌 걸 확인하고 사라지며 던지는 조롱들을 한 시간 동안 감내해야 했습니다. 실은 한 시간 같았던 20분이었어요.


그 탓에 20분 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저는 담임 선생님이 오시고서야 처음으로 입을 뗐어요. 반 아이들이 모두 저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어요. 지옥 같던 자기소개 후 조례가 끝나고 울상이 된 저는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반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뭔가 이상하다느니, 다른 반이라느니 수근대느라 아무도 제게 말을 걸지 않았어요.


"너 혹시 **라고 알아?"


그때였어요. 제 인생을 뒤바꿀 한마디요.


저와 달리 앙칼진 얼굴을 한 친구가 제게 건네준 첫 마디는 순화해서 서브컬쳐를 아냐는 물음이었어요.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거짓말의 시작이었습니다.


친구는 제게 네이버 카페를 가입시키고, 그림들을 보여주고, 특정 만화나 일본 밴드들에 대해서도 아는지 물었어요. 서코도 가 봤냐고, 그럼 코스프레도 해 봤냐고 물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저는 그냥 계속 응! 응! 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알았을까요? 제가 고등학교 때는 직접 옷을 만들어 코스프레를 하고, 유명한 코스프레 화보에 실리고, 20대 때는 무대에 서서 춤을 추고, 그 친구와 같이 코스프레 커버팀을 만들어 유튜브에 영상을 올릴 거란 것을요. 전혀 몰랐겠지요? 그럼 이건 알았을까요? 서브컬쳐로 이어진 우리는 단짝이 될 거란 걸요. 언젠가 모두 털어놓은 덕에 친구는 거짓말로 시작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19년 차 단짝이에요.


저는 학교가 끝나면 매일 친구 집으로 향했어요. 같이 게임을 하고, 만화를 보고, 옷을 만들었어요. 용돈을 모아 치킨을 사 먹고, 과자를 사 먹고, 떡볶이를 사 먹었어요. 때로는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같이 운동을 하며 살을 뺐고, 화장 연습을 하고, 렌즈를 끼려고 2시간을 낑낑댔어요. 친구 집에서 같이 만화 노래도 부르고, 녹음하고, 편집도 해보고, 춤도 연습했어요.


주말엔 같이 행사장에 가서 코스프레를 하고, 서로 화장을 해주고, 사진을 찍었고요.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 푸드트럭에서 타코야끼를 사 먹었어요. 집에 돌아오면 뻗어 있다가 샤워를 했고, 친구 어머니가 차려주신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갔어요. 고등학교 때까지요.


20대를 넘어서면서 잠시 멀어졌었거든요. 둘 다 학교에 다니거나 아르바이트하기에 바빴어요. 연락도 자주 주고받았고, 가끔 한 번씩 만나기도 했지만요. 둘 다 이사를 거듭하면서 점점 거리가 멀어졌어요. 시간도 거리도 먼 우리는 현실에 집중하느라 서브컬쳐는 자연스레 묻혀갔어요.




하지만 20대 중반이 되고 친구에게 다시 제안이 왔어요. 우린 어렸을 때와 달라진 경제적 여건으로 조금 더 퀄리티 높은 코스프레를 즐기기 시작했어요. 예쁜 스튜디오를 예약하고, 더 화려한 옷을 주문하고, 친구는 급기야 전문 카메라까지 구매하기에 이르렀어요. 캐리어에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3시간 거리의 수영장이 있는 스튜디오에 가서 촬영을 하기도 했는데, 그걸로 부족했던 걸까요? 급기야 주변지인들을 모아 팀을 만들어 매주 지하 연습실에서 같이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그리하여 로케이션 촬영까지 다녀오고, 전문 사진사를 고용하며 그야말로 돈과 시간과 열정을 때려 넣었어요.


우리는 서로의 팬이었어요. 친구는 비싼 카메라로 저를 제일 많이 찍었고, 자신의 옷보다도 제 옷을 더 많이 샀어요. 저는 제 사진보다 친구 사진을 더 많이 보정했어요. 한 번도 먹어보지 못 한 비싼 스테이크를 친구에게 사주기도 했어요. 그건 지금도 못 사 먹을 가격이에요.


"우린 아마 30대가 되어서도, 40대가 되어서도 이러고 있을 것 같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20대 후반에는 모두 그만두게 됩니다. 너무 모든 걸 때려 넣은 시간이었기 때문에요. 이상하죠? 성인이 되어 돈을 많이 벌면 더 오래 더 행복하게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어요. 처음에는 결과물이 더 좋으니까 그만큼 더 기뻤어요. 그런데 갈수록 결과물에 집착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결과물에 집착할수록 결과물이 다 비슷비슷해졌어요. 재미가 줄어들면서 횟수를 늘렸어요. 한 달에 한두 번 하던걸, 주에 한 번씩 했고요. 그러다 주에 두 번씩 하고, 나중엔 평일에도 모여 연습했으니까요.


처음엔 "이러려고 일하지!" 였는데 어느샌가 "이러려고 일했나?"가 되더라고요. 어느새 경제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한계를 넘어섰지만,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이어갈 뿐이었어요. 서로가 보기에 서로가 지쳤음에도요.


그 외에도 여러 일들을 겪으며 저희는 그 취미를 모두 접었습니다. 채널과 계정을 삭제했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처분했어요. 저는 마음으로 하나 더 깨달았습니다. 좋아하는 것일수록 소중히 다뤄줘야 한다고. 하지만 후회하진 않아요. 무언가에 순수하게 깊이 몰입했던 경험은 돈 주고도 살래야 살 수가 없으니까요.




지금에야 드는 생각이지만요. 제가 그 취미를 좋아했던 것도 있지만, 그 친구를 정말 좋아했던 것 같아요. 물론 친구의 결혼 소식에 편지를 3장씩 써갈 만큼 지금도 참 좋아해요. 신부도 안 우는 결혼식에서 제가 제일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여전히 친구는 앙칼진 얼굴로 저를 달래요.


"야, 울지마! 네가 왜 울어?! 됐고 내년에 옷 입을 준비해. 너 코스프레 시켜줄 거니까!"


제 친구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하얀 드레스를 입고서도 신랑보다 저를 챙겨주는 것도, 그리고 서브컬쳐나 저를 좋아하는 것까지요.




얼마전에 오랜만에 친구의 그 시절이 보고 싶은 거예요.

새벽 늦게 겨우 발견했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 시절 영상들을 보면서 우리가 또 무언가에 저만큼 순수하게 열정적일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취미를 즐기려고 하면 많은 것이 제 앞을 가로막아요.


그때는 아무것도 저희 앞을 막을 수 없었거든요.

돈이든, 시간이든, 악플이든, 뭐든 그저 헤쳐나갈 방법만 찾아 갈 뿐이었네요.

불도저같았던 10대 중반~20대였어요.


여러분에게도 그런 시기나 그런 취미가 있었을까요?


이전 05화너는 네 생각보다 단단한 사람일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