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던진 말이었는데 친구가 이상한 표정을 짓더라고요. 설마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야? 같은 표정이었어요. 그러게요. 저는 왜 제가 핑크색을 좋아하는지 몰랐을까요? 주위를 둘러보면 어디든 핑크색 물건이 하나 이상은 꼭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실은 이렇게 제 취향을 모르고 살아온 데는 이유가 있었어요.
처음부터 핑크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부정했던 건 아니고요. 아마 사춘기 때부터였을걸요? 제 또래 여성분들은 초등학생 때 이름 대신 조폭 마누라라는 동명의 영화를 별명으로 불린 경험이 있을 거예요. 저도 그랬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한 왈가닥했거든요.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사춘기가 시작되었는데 제가 점점 여자가 되어갈수록 남자아이들의 놀림이 심해졌어요.
"예쁜 척한다"라는 말이 그렇게 부끄럽더라고요. 그래서 핑크색을 비롯해 여자아이 같은 물건이나 옷들을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기 시작했어요. 남자애들과 뛰어노는 것도 점점 불편해졌고, 장난으로 던진 농담에 수치스러워지기도 했어요. 그럴수록 저는 남자애들과 멀어졌지만 돌아온 건 "여자인 척한다"라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중학교로 올라가면서는 변명거리를 만들기로 했어요. 실은 저, 예쁘고 귀여운 거 좋아하는 보통의 여자아이였거든요. 하지만 친구들과의 관계도 깨트리긴 싫었어요. 변명이랄 게 대단한 건 아니었어요.
이를테면 예쁜 치마를 입기 위해 합창단에 들어가고, 하기 싫은 척하면서 화장하고, 시력도 좋으면서 렌즈를 끼는 정도였어요. 도수 없는 서클렌즈를 꼈으면서요. 어쨌거나 사소한 변명은 작은 거짓말이 필요했는데요. 그 거짓말이 점점 커지더니 저를 집어삼켜 성인이 되고서야 깨달은 거예요.
아, 맞아. 나 핑크색 좋아했지!
말이 서른이지 서른이 넘을 때까지 저를 속이고 살았어요. 믿어지나요? 저도 이게 이렇게까지 오래 지속될 거짓말이었나 싶어요. 대체 왜? 아마 부끄러운 마음에 시작한 거짓말이 언젠가부터 착각을 일으켰던 것 같아요. 의도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다가 습관처럼 되뇐 거죠. 내가 좋아하는 건 파스텔톤이지, 핑크색이 아니야. 나는 그냥 귀여운 걸 좋아하는 거지, 여성스럽게 보이고 싶은 게 아니야.
하지만 둘러보면 숨겨지지 않는 취향이라는 게 있는가 봐요. 하루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마우스나 키보드, 장 패드 같은 사무용품은 물론이고요. 매일 입고 자는 잠옷, 담요, 이불도 핑크색이에요. 겨울만 되면 즐겨 입는 니트도 핑크색, 여름이면 꺼내는 휴대용 선풍기도 핑크색! 그 외에도 예쁜 핑크색들이 가득해요. 저는 365일 24시간 핑크색과 함께하면서 좋아하는 색이 무어냐 물으면 파스텔톤? 하고 모호하게 답해왔던 거예요.
뭐, 거짓말은 아니에요. 핑크색으로만 가득 차면 오히려 핑크색이 묻혀버리거든요. 이를테면 저희 집 인테리어의 메인 컬러는 아이보리에요. 가구도 밝은 원목 가구를 쓰고 있고요. 거기에 고양이용품은 노란색으로 채우고 나면 작은 핑크색 물건들이 포인트가 되기 시작해요. 무엇보다 그 공간에 핑크색 잠옷을 입고 서 있는 제가 가장 돋보이는 핑크색이 되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제 주변의 가장 큰 색들은 핑크색이 아니더라고요.
취향이란 게 참 재밌어요. 제가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게 드러나고 있었더라고요. 저는 지금 말복이라는 캐릭터뿐 아니라 이전에 그리던 캐릭터에도 핑크색을 주로 메인으로 사용했어요. 특별한 이유를 찾진 않았어요. 그냥 사랑스럽고 예쁜 컬러니까 자주 사용했는데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자각을 못 했다니, 이제 와 생각하면 필사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척을 해 온 거예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비록 변명 속에 숨어서 좋아하긴 했지만, 좋아하길 포기하진 않았다는 사실이요. 언젠가 제가 핑크색을 좋아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주변에 하나도 없었다면 슬펐을지도 몰라요. 언젠가 깨달았을 때 제 곁에 소소히 자리 잡고 있는 물건들을 보며 작은 행복을 느꼈어요. 그리고 지금은 제가 좋아하는 색을 자유롭게 쓴다는 걸 더 큰 행복으로 느끼고요.
나를 속이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하는 소소한 지금의 날들이 좋아요. 여러분이 알아채지 못한 여러분의 취향은 어떤 게 있나요? 주위를 둘러보는 하루가 되길 바라요.
나도 알아채지 못 한, 그러나 남들이 보기엔 분명해보이는 취향이 있을지 몰라요.
한 번 잘 살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