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빛이 바래지지 않도록

by 말복


아무리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저라도 만화를 오래 그리다 보면 제 마음의 빛이 바래지는 걸 느낄 때가 있어요.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마음속 반짝임을 잃는 것인데요. 그 반짝임의 중심엔 그림이 자리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가장 공들이는 일은 그 빛이 바래지지 않도록 보듬고 다듬는 것이에요.


보통은 그런 때가 오지 않도록 매일 그리고, 새로운 것도 그리고, 강의나 유튜브 등을 찾아 공부하기도 해요. 사람들과 같이 스터디를 하고, 챌린지를 하고, 혹은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런가 하면 웹툰 신작을 살펴보고, 변화하는 트렌드를 분석해 보고, 새로운 작가님들의 계정을 염탐해 보기도 해요. 모두 제가 즐거워서 자연스럽게 하는 행위지만, 제 마음을 가꾸는 것이기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임이 꺼져가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장작은 충분한데 불씨가 작은 것과는 조금 다른 상황인데요. 이때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요. 에너지 자체가 부족한 긴급상황인 거거든요. 신작을 찾아보고, 새로 좋아할 만한 것들을 찾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하잖아요. 이럴 땐 그냥 아직까지도 좋아하는 것, 이미 제 마음에 오래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을 다시 찾곤 합니다.




지난 편에서는 애니메이션보다 책이 좋다고 했었지요? 제가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어서요. 그런데 이런 시기에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그저 오감을 맡길 수 있도록 애니메이션들을 보곤 합니다.


이를테면 카드캡터 체리, 마녀 배달부 키키, 러브라이브 시즌1,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하이큐 등이 있어요. 보통은 이 안에서 결정되어요. 다소 마이너한 작품들도 있지만, 모두 제가 오랫동안 좋아해 온 애니메이션들이에요. 이 작품들은 199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다양한 시대에 걸쳐 연재되었어요. 그런가 하면 여자 고등학생들의 아이돌 이야기부터 남자 배구부의 성장기까지, 희망을 전하는 마법소녀물부터 절망을 함께 담은 피폐한 마법소녀물까지 폭넓은 장르를 아우르고 있어요. 얼핏 보면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어요.


이 작품들 속 주인공들은 모두 부딪치며 성장하고, 때론 희생하며, 무엇보다 꿈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있어요. 네, 다른 말로는 반짝임이지요. 만화 주인공들을 보며 반짝임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을 갖는 거예요. 그래도 저마다의 다른 반짝임을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작품을 골라보고는 해요.




첫 번째로 소개 드릴 작품은 카드캡터 체리에요. 클램프 작가님들의 말을 빌리자면 연재한 모든 작품의 세계관을 통틀어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로 설정한 캐릭터가 체리라고 해요. 체리는 초등학생 특유의 발랄함과 엉뚱함이 있지만, 그걸 솔직하게 내보이는 순수함이 있어요. 제가 본 많은 작품을 통틀어도 체리는 가장 사랑스러워요. 하지만 사랑스러운 체리는 겁이 많은 보통의 초등학생 여자아이인데요. 그럼에도 문제에 부딪치며 성장하는 힘이 있어요.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회피하지 않고 직접 나서서 부딪치며 해결해요. 체리를 처음 봤을 때 제 나이도 초등학생이었는데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체리에게 대단함을 느껴요. 제 스스로 한계에 직면한 것 같을 때, 그래서 문제에 회피하고 싶을 때면 체리를 찾는 것 같아요.


두 번째는 러브라이브 시즌1로 9명이나 되는 여자 고등학생들이 모두 주인공인데요. 시골 고등학교의 폐교를 막기 위해 아이돌이 되어 학교를 홍보하는 이야기에요. 당연히 학교를 지키기 위해 모인 학생들이니 모두 아이돌로서는 미숙해요. 이 친구들이 아이돌이 되기 위해, 그리고 무대에 서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들은 주먹구구식이에요. 돈이 없으니 직접 옷을 만들고, 노래를 만들고, 학교에 모여 연습하는 시간들을 보고 있으면 존경스럽기까지 해요. 아이돌이 처음이기 때문에 당연히 매 순간 실패와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데요. 그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함께 헤쳐나갈 방법을 찾아 나서는 9명의 친구를 보면 문제를 문제라 생각하는 게 가장 문제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아요.


세 번째는 고등학생 남자 배구부의 이야기를 담은 하이큐입니다. 워낙 많은 캐릭터가 나오는 만큼 이야기도 방대한데요. 제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에요. 주인공 히나타는 키가 작은 미들 블로커에요. 배구에서 특히나 미들 블로커는 키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해요. 그러나 히나타는 신체적으로 불리한 조건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강점을 찾아서 갈고 닦아 활약하는 캐릭터에요. 그리고 밤낮없이 연습합니다. 하이큐에는 히나타 뿐 아니라,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하는 캐릭터들이 많이 나와요. 거의 진 것이나 다름없는 경기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승리를 가져오려는 캐릭터들의 열정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뜨거워져요. 꿈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자는 그런 마음이 들어요.


네 번째는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에요. 주인공 마도카는 다른 작품의 마법소녀들보다 소극적이에요. 그러다보니 마지막까지도 마법소녀가 될지 말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 다소 특이한 플롯이 전개됩니다. 마도카의 친구가 마법소녀가 되고, 다른 동료 마법소녀들이 활약하는 동안에도 마도카는 끝까지 고민을 거듭하는데요. 이 설정 자체가 이 작품의 핵심 이야기를 만들어내요. 그리고 마도카는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세상과 친구를 지켜내요. 가장 마지막까지 고민한 우유부단한 마도카였지만, 가장 강단 있게 가장 큰 희생을 하는 걸 보면서 강하다는 게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결단을 내리지 못해 밤잠을 못 이루고, 나는 왜 이리 마음이 여린지, 내가 정말 꼭 이걸 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흔들리는 건 아닐까? 혼란스러울 때면 마도카가 떠올라요. 마지막 직전까지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지만, 가장 큰 역할을 강단있게 해냈던 단단한 마도카가요.


마지막으로는 마녀 배달부 키키 차례인데요. 키키는 제 마음의 고향과 같은 작품이에요. 키키는 어엿한 마녀가 되기 위해 혼자만의 힘으로 자리 잡으려 하지만 문제는 연이어 발생해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한 걸음씩 나아가고, 끝에 가서는 친구를 구해내기도 하죠. 멋진 마녀가 되기 위해 새로운 마을로 모험을 떠나고, 근사한 풍경이라는 이유로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친구들이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기 시작하는 키키를 보고 있으면 누구나 겪는 일인 거구나 싶기도 해요.




이들은 모두 자신을 걸고 온 마음을 다해 나아갔어요. 때론 무너지고, 때론 울면서도 멈추지 않았어요. 세상을 지키기 위해, 학교를 지키기 위해,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혹은 꿈을 지키기 위해서요. 그 마음에서 비롯된 치열한 몸부림과 고민의 흔적들을 보고 있으면 가장 단순한 게 정답이란 말이 떠올라요. 그럼 저도 제 마음속 가장 깊은 반짝임, 단 하나만 우선으로 생각하자 하고 가벼워지는 거지요.


제게는 연인, 고양이, 친구, 동료, 가족 등 제가 다 품어줄 수 없어 되려 마음이 아플 정도로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제 자신과 그림이에요.


앞서 나열한 작품들을 매일 볼 수도 없고요. 매일 본다고 매일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도 아니에요. 힘들 때마다 한 편 두 편 다 정주행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판권의 문제로 볼 수 없는 작품들도 있어요. 그런데 재밌는 게 무언지 아세요? 이 작품들이 제 마음속 깊숙한 곳에 콕 남아 있어서, 저는 OST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회복되곤 해요. 하이라이트 클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때론 일할 때 틀어두는 정도로도 마음이 환해져요.


어둠이 걷히고 환해지고 나면 금세 마음이 반짝일 준비를 해요. 뽀득뽀득 씻어주면 다시 그 반짝임이 광택을 살짝 보여요. 그리고 다음날이면 새하얀 자태를 드러내는 거예요. 저는 아직도 제 안의 이 순수한 마음들이 좋아요. '오타쿠인 걸 숨겨야지.' 하고 지내다가도 이렇게 신나게 떠들고 마는 거예요. 제 마음속에 순수한 반짝임이 있는 게 무척 행복해요. 정말이지, 좋아하는 마음은 도저히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어요.





참나.. 만화 얘기를 할 때면 이렇게 글자수가 평소보다 훨씬 많아지는 게 너무 웃겨요.

저는 저를 잘 드러내지 않는 것 같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데요.

만화 얘기할 땐 이렇게나 투명해진다는 게 웃기고 어떻게 오타쿠인 걸 숨기겠다는거야 싶어요.


이제 다음 화면 마지막화에요.

이 시리즈는 15화까지 연재된 후, 같은 내용으로 인스타에 연재했던 만화가 15화 연재될 예정이에요.

마지막화는 원래 20일에 올라와야하는데요.

25일 마감인 지원사업 작성에 열을 올리고 있어 (예약글을 남기는 지금은 3월 7일이에요.)

한 주 휴재를 갖고 3월 27일에 업로드할게요.


그 때까지 행복이 깃들고 있길 바라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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