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더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저는 애니메이션보다 만화가 좋고, 영화보다 책이 좋아요. 매체가 발달하면서 많은 분이 영화나 애니메이션 외에도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영감을 받고 세계를 확장하게 된 것 같은데요. 저는 그 속도에 맞추는 게 힘들더라고요. 빠르게 지나가는 장면들도 힘들고, 그 속도 속에서 제 생각을 따라잡는 것도 어려워요. 심지어 요즘엔 숏폼 콘텐츠가 더 많아지면서 짧은 시간 안에 영상과 소리를 끼워 넣잖아요. 1분 동안 전달되는 정보의 양이 벅차단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책은 달라요. 책은 제가 생각할 시간을 주거든요. 책을 읽을 때는 화자가 저를 재촉하지 않으니까요. 책의 매력은 무궁무진하지만, 저는 특히 "저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 점이 좋아요.
그래서 저는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책 읽는 시간 자체를 더 좋아해요. 사실 집중해서 책을 읽는데엔 재능이 없어요. 어떤 때는 30분 정도만 읽어도 머릿속이 꽉 차 버리거든요.
저는 청각이 예민하고 생각하는 속도도 느린 편이에요. 사람들과 만나면 실시간으로 오가는 정보가 흡수되기도 전에 말이 튀어나와요. 그러다 보니 잠들기 전엔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할 때가 많아요. 평소에 하지 않던 생각도 사람들과 있을 때면 그냥 튀어나와요. 정신없어서 아무 말이나 하고 마는 거죠.
일할 때도 소리가 들리면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요. 요즘은 오히려 너무 깊은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드라마나 음악을 틀고 일하기도 하지만요. 정말 피곤할 때는 아무것도 안 틀어두고 조용히 일하는 걸 좋아해요.
그 정도로 예민하다 보니 더더욱 책 읽는 시간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그 시간 동안은 제 느린 속도를 천천히 찾아갈 수 있어요. 바쁜 세상 속에서 숨 가쁘게 움직이다가도 책을 들여다볼 땐 제 속도대로 움직일 수 있잖아요. 책은 제가 충분히 생각하고 답할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주니까 저도 제 생각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어요.
세상의 기술이 발전하면서 창작자들의 의도를 더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어요. 혹은 누구나 쉽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만큼 상대방의 생각과 의도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게 된 것 같아요. 내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들여다보려 노력하지 않아도 정보가 쏟아지니까요. 쉽게 얻어지는 정보들이 많으니까, 더 깊이 생각하기 전에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 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요.
*책은 한 줄 요약, 세 줄 요약을 단정짓지 않잖아요. 그 때문에 드는 시간을 의미 없어 하는 분들도 많지만, 제게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요. 당신의 생각은 그런 건가요? 아, 아까 했던 말과 이어지는 것 같은데…. 하고 어디서 그런 말을 했더라. 천천히 찾아야 해요. 누군가 댓글에서 시간을 집어주진 않았을지 찾아볼 시간에 직접 거슬러 올라가면서 찾아보는 동안 우리 관계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생각을 하기도 하고요.
(*실용서 등 일부 예외인 장르들이 있는 걸 제하고요.)
그러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책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재촉하지 않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는 아직 그게 어려워요.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제 이야기를 하게 되거든요. 그럴수록 곱씹어야겠지요. 내일은 더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리고 또 한 번 책에게 배워요. 말하는 속도나 방식이 다르더라도,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고 느낄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사람이 얼마나 다정한지요. 그렇게 책처럼 다정한 친구가 되고 싶어요.
언제쯤 저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 제 이야기도 다 소화하지 못 한 것 같은데, 언제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담아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