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희 Sep 03. 2018

천박한 아마추어리즘과 경제

'우리는 지금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

마이클 샌델은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 안에서 알래스테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란 철학자의 이야기를 언급한 바 있다.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After Virtue)’이란 책에 그렇게 적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사회적 의견이 분분하다. 필자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폐지해야 하는지 지속해야 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지금처럼 모든 언론이 소득주도성장에 대해 이야기하기까지는 그런 말이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았던 덕에 그 정책의 깊이를 알지 못해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는 것 같다. 그 방향이 옳다, 그르다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지금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


우리는 지금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


필자는 트렌드를 분석하는 사람이다. 지난 20년 동안 트렌드 분석을 업으로 살아왔다. 이 일을 하며 느끼는 바는 최근 5년간 세계는 재크의 콩나무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속도로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의 일부만이 그러한 속도로 자라고 있으며, 그 주인공들은 중국이란 특수한 상황의 국가를 제외한다면 모두 미국, 유럽, 일본, 싱가폴, 홍콩과 같은 선진국(도시)들이다.


어떻게 그들은 저런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일까.     

또 우리는 어째서 저런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일까.


누군가는 규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은 경제적으로 이런 속도가 가능하려면 먼저 사회가 정직하고 투명해야 한다. 기본적인 정의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사회는 경제적으로 시원한 행보를 내딛기 어려워진다.


필자의 많은 친구들은 패션 디자이너다. 아직도 동대문에선 그들의 디자인을 카피한다. 또 젊은 스타트업들이 시작한 이커머스몰들조차 아무렇지 않게 그 제품을 매입해 유통한다. 생각해보자. 남의 디자인을 베끼는 게 만연한 사회와 스스로 창의적인 디자인을 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 과연 어떤 사회에서 혁신적인 디자인이 탄생할 것인가?


필자의 남편은 지금 자신의 교수와 소송 중이다. 교수는 남편의 논문을 표절했다. 하지만 법이 바른 판결을 내려 줄 것인지, 한국에서 교수가 제자의 논문을 베끼면 안 되는 것인지는 사회적으로 100% 명확하지 않다. 다시 생각해보자. 논문표절이 만연한 사회와 모두가 창의적인 연구를 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 과연 어떤 사회에서 혁신적인 연구가 나올 것인가?


우리가 자라나지 못한 이유, 지난 5년간 변혁기에서의 주도적 기회를 상실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우리는 그간, 마음껏 꿈을 펼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해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되도록 몸을 사리도록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 덕에 분야별로 풍부한 Try & Error의 데이터를 얻지 못했다. Try 한다는 것 자체가 좋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며, 심지어 Error는 더더욱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는 되도록 Try 하지 않고, 되도록 Error를 인정하지 않도록 우리를 굴절시켰다.


이런 상황을 지나고 있는 우리 중에 과연 누가 진정한 전문가일 것인가?

필자는 매킨타이어의 말에 동의한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답하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천박한 아마추어리즘이란 무엇인가?


샌델의 책에는 매킨타이어가 제시한 젊은 독일인의 예가 등장한다. 그는 ‘1945년 이후에 태어났으니, 나치가 유대인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든 현재 자신과는 도덕적으로 연관성이 없다’고 믿는다. 샌델이 지적하길, 매킨타이어는 이 예에서 도덕적 천박함을 발견한다. “나는 사회적, 역사적 역할이나 지위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이런 천박한 아마추어리즘에 젖어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의 경제지표에 대해 타인의 책임을 묻고 있는 정치인들은 천박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이 재크의 콩나무처럼 자라는 동안 한국을 불투명성에 가두고 제자리걸음 하게 한 장본인들이다. 정치적 정의도 달성하지 못한 정치인들이 이제 모른 척하고 자신들이 망가뜨린 경제문제를 논하는 건 우습지 않은가?


지금의 경제지표를 풀어갈 정확한 원칙이 있다는 듯이 말하는 정치인도 천박하다. 그렇게 확신하기엔 아무도 실험을 해 보지 않았다. 많이 해본 것처럼 하면 안된다. 너무 큰 Try & Error를 할 수는 없다. 작은 스타트업에게조차 Pilot은 일반적이다. 어째서 작게 순차적으로 시작하며 Error의 폭을 보지 않는가?  


우리는 전환의 국면을 맞은 Beginner들이다. 시행착오는 천연덕스럽게 저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누가 잘못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Beginner인 우리에게 오고야 만다. 이를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전환된 국면에서 늦게나마 시작을 할 수 있다면 이는 감사한 일이다.


확실한 건, 어떤 시행착오가 있다 할지라도, 과거의 불투명한 사회로 회귀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지금 겪고 있는 혼란들은 진작에 투명해지지 못해서 이제사 겪고 있는 뒤늦은 시행착오다. 누군가 지금의 혼란을 문제삼아 시계를 되돌리려 한다면, 지금 겪어내야 할 시행착오는 또다시 뒤로 미뤄질 뿐이다. 대체 얼마나 더 늦어 되돌릴 수 없어야 우리가 스스로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지를 깨닫게 될까.    


앞으로 정부는 과연 어떤 경제정책을 펼치고, 우리는 또 그에 어떻게 반응하게 될 것인가.

부디 과거의 아마추어리즘을 뛰어넘는 성숙한 제안과 토론, 성숙한 설득과 비판이 이어졌으면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