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벗들에게
나는 며칠 전 인스타그램의 계정을 열었다. 그동안 트렌드를 분석하며 수없이 다루었던 SNS이자, 다른 이들의 계정을 허다하게 들락거렸던 곳이었지만, 스스로 계정을 튼 것은 뒤늦은 며칠 전이였다. 그만큼 인스타그램은 내게 그렇게나 하기 싫고, 그러나 더 늦게 전에 시작해야만 하는 골치 아픈 숙제였다.
인스타가 싫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나는 사진 몇 장, 이미지 몇 장으로 타인과 소통한다는 것에 대해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언어란 도구가 무색한 공간에서 나는 1살 아이 같은 초짜다. 새로운 무언가에 다시 새내기로 적응하려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어색한 성장기가 필요한 법인데, 이런 걸 겪기엔 내 나이와 경력이 스스로에게 너무 무거웠다.
우리는 모든 삶의 순간에서 원하는 선택은 사실 ‘마땅한’ 선택이나 ‘올바른’ 선택이라기보다는 ‘보기 좋은’ 선택인 것 같다. 청춘남녀들은 ‘보기 좋은’ 배우자를 만나길 원하며, 부모들은 자식이 ‘보기 좋은’ 아이로 자라나길 바란다.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면 새로운 길에 들어서기보다는 자신의 나이와 경력이 빛을 발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보기좋아’ 보인다.
결국 나이가 들면 모험을 꺼리게 되는 법이다. 나 또한 그런 마음으로 인스타를 외면해왔다.
하지만 이건 나의 직업을 돌이켜볼 때,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이런 거대한 트렌드를 직접 체험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과 소통해 보지 않고서, 어떻게 트렌드의 정수를 짚어낼 수 있을까. 이 불편함이 늘 마음 한 켠에 남아있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마땅한 선택을 하지 않고 망설여왔다.
코엔 형제가 2007년 발표한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제는 No Country for Old Men이다. 나라면 아마 이 제목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보다는 ‘노인이 설 땅이란 없다’로 해석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영화에는 노년의 보안관 에드 톰 벨(Ed Tom Bell)이 등장한다. 그는 때로 현명하고 노련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무력하고 찌들어 보인다. 그가 잡기엔 너무나 악랄하고 뛰어난 지능범 안톤 시거(AntonChigurh). 보안관 벨은 시거를 체포하지도 응징하지도 못한다.
영화에서 보안관 벨의 존재는 3대째 보안관을 해오고 있다는 의미에서 ‘답습’의 상징이다. 영화 속 세상에는 물론 그가 설 자리가 있지만, 영화 내내 감독이 던져오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벨은 비록 이상한 노인은 아니지만, 벨이 보안관의 자리에 있을 수 있던 것은 사실 그의 실력이나 지혜가 낳은 결과가 아니라 혹시 그저 우연인 것은 아닌가.
영화 내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은 ‘운’으로 묘사된다. 안톤시거는 사람을 죽이기 전에 그 운을 동전에 맡긴다.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는 그저 동전을 던져 나오는 결과에 불과하다. 그가 체포되는 순간에도, 권선징악이나 결자해지와 같은, 선이 악을 응징하는 통쾌한 승리 따윈 없다. 시거는 결국 우연하게 다쳐서는 시시하게 체포된다.
이 어이없는 해프닝은 어찌 보면 우리의 인생사 이기도 하다. 세상은 어쩌면 원래 그런 곳이 아니던가.
이런 세상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무의미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노인들은 자신이 답습한 것을 젊은 세대에 가르치려 든다. 자신의 삶이 괜찮은 것들을 누려왔다고 믿는 노인일수록 그러하다. 하지만 그가 누려온 것들은 사실 그의 그런 지혜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우연이 아니었는가 누가 묻는다면, 과연 몇 명이나 나는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할 수 있을까.
폴 프와레는 ‘복식 혁명’을 일으켰던 20세기 초의 패션 디자이너다.
그는 여성의 복식에서 코르셋을 없앤 인물로 유명하다.
20세기 초, 유럽이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유럽의 상류층 사이에선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흘러들어 온 문물에 심취하는 풍조가 생겼었다. 프와레는 페르시아풍의 이국적 스타일로 동서양을 접목하는 패션을 소개했고, 이 스타일들은 이브닝 파티에서 가장 유혹적이고 환상적인 드레스로 각광받았다. 당시 프와레의 드레스는 혁신적이고 글로벌하며 첨단의 문물을 이해하는 상류문화의 정수와도 같았다.
그러나 곧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프와레는 군에 복무하느라 잠시 하우스를 닫아야 했다. 시간이 흘러 전쟁이 끝나고 프와레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세상은 놀랍게 변해 있었다.
코코 샤넬이 새로운 스타로 등장한 파리 패션계는 이제 단순하고 심플한 옷에 열광하고 있었다. 프와레는 이들이 전쟁으로 인해 잠시 미적 기준을 상실한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다시 제대로 된 드레스를 만들기만 하면, 사람들은 다시금 환상적인 프와레 스타일로 되돌아올 거라 믿었다.
그는 우연을 믿지 않았다. 젊은 날의 성공은 오직 자신에 의한 것이었으며, 언제건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 필연의 성공을 가져올 수 있는 존재라 확신했다.
프와레는 그렇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선보이며 자신있게 패션계로 복귀한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 대중들은 프와레의 디자인에 아무 관심도 갖지 않았다. 프와레는 결국 파산했고 소리 소문 없이 잊혀져 갔다. 그의 말로는 비참했으며, 가난으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그가 세기 초에 일으켰던 복식혁명은 오롯이 그의 실력이 불러온 필연이었을까.
아니면 어느 정도는, 그의 미학과 시대적 정서가 맞아떨어지며 증폭된 럭키 해프닝이라 봐야 하는 것일까.
올해로 마흔일곱. 나는 곧 쉰을 앞두고 있다. 딱 보기 좋은 선택만 하고 싶은 나이다.
젊었을 때는 이 나이쯤 되면 그동안 살아온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후배들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을 본질을 일깨우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노년을 꿈꿨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원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해서는, 그간 쌓아온 경험과 지식으로 후배들에게 일깨워 줄 수 있는 본질이란 결국 그들에겐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들이 되었다. 사실 동시대적 언어로 말하지 못하고서야 어떤 본질이 그들 마음에 가 닿을 것인가. 세상을 향해 무언가 의미 있는 말을 뱉기 위해선, 나는 다시 초짜가 되어 지금의 빠른 변화를 체화해야 하고, 다시 한번 어색한 성장기도 거쳐야 한다.
이런 선택은 그다지 보기 좋은 것은 아니어서, 말하기 좋아하는 동년배들에겐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고, 젊은 친구들에겐 노인의 발악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마땅한 선택이라면, 어떡할 것인가?
한 가지 기쁜 소식은 그간 살아온 경험과 지식은 무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경험과 지식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한참 뒤에 온다. 다시 초짜가 되어 어색한 성장기를 거치는 동안, 그것이 반드시 열매로 연결되도록 하는 힘, 즉 ‘마땅한’ 선택을 결국 ‘보기좋은’ 선택으로 만들어가는 힘은 노련함과 지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불혹을 지나며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진심으로 세상에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불의에 지고 세상의 불합리함에 지라는 뜻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상을 거스를 수 없음에, 나의 삶에 찾아왔던 크고 작은 성공이 어느 정도는 바로 그런 세상의 변화가 가져온 우연의 산물이었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 의미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러니 별 수 없다. 마땅한 선택을 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