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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코 Mar 10. 2023

프린팅 티셔츠에 관한 고찰

미국에서 프린팅 티셔츠를 입고 다니면 일어나는 일


“너 마추픽추 다녀왔니?” 마트에서 물건을 계산하려고 계산대에 서있을 때 직원이 나에게 물었다. ‘응? 마추픽추? 웬 갑자기 마추픽..아..?!’ 생각해 보니 내 티셔츠 뒤쪽에 마추픽추 같은 게 그려져 있던 것 같기도 하고. 머쓱하게 웃으며 이건 한국에서 사 온 거라고 이야기해 줬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너 플로리다에서 왔어?” 북페어에 갔는데 셀러가 나한테 물었다. '엥? 플로리다..? 내가 플로리다에서 온 것 같이 생긴 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내 맨투맨에 새겨진 플로리다 글씨를 가리켰다. 또다시 머쓱하게 웃으며 이거 한국 H&M에서 산 거라고 말해줬다.


미국 사람들은 티셔츠에 새겨진 프린팅을 보면 그 티셔츠를 입은 사람과 관련된 정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프린팅 티셔츠는 '정보' 보다는 '디자인'으로 받아들여지니까, 어떤 프린팅 티셔츠를 입어도 전혀 그런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가 없으니 굉장히 흥미로운 포인트였다. 재미에서 시작해서 고심까지 해본 결과 나는 총 3가지 가설 혹은 사실을 발견했다. 


첫 번째, 미국인들은 영어를 정보로 받아들이는 점. 건축가 유현준 교수님의 유튜브에서 한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길거리의 간판들이 굉장히 너저분해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 것에 대한 교수님의 답변이 인상적 이었다. 한글을 모국어로 쓰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한국어가 가득한 간판을 보면 읽어야 하는 ‘정보’ 로서 받아들인다는 것. 반면 외국을 가면 간판이 많이 달려있어도 간판에 쓰인 글씨를 정보로서 인지하지 않고 하나의 그림, 그래픽으로 인지하기 때문에 풍경과 더 조화스러워 보이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미국 사람들이 내 티셔츠를 보고 어디 다녀 왔냐고 물어보는 것도 이해가 간다. 우리가 ‘서울’ 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외국인들을 보면 오잉? 서울 다녀왔나? 하는 것처럼 이 사람들도 ‘Florida’ 라고 쓰인 티셔츠를 발견하면 오 이 사람 플로리다 사람? 이라고 인식하는 거지.



두 번째는 생각의 규모에서 오는 차이. 레터링을 정보로 인식한다고 쳐도, 우리나라에서 마추픽추 옷을 입고 다닌다고 마추픽추를 다녀왔을 것이라고 까지는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곳은 미국! 전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고, 나라 자체가 땅덩이가 넓으니 그 먼 곳에서 왔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게다가 마추픽추는 같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으니 마추픽추 쯤은 다녀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한국에서 마추픽추에 다녀온 사람을 만나는 건 극소수니까. 사람이 사는 생활 반경, 땅의 규모에 따라서 생각하는 가능성의 규모도 커지는 게 아닐까라는 가설을 세워봤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이곳 사람들은 본인 관심사가 새겨진 티셔츠를 실제로 입고 다닌다는 것! 예를 들어 나사(NASA)에 관심 있는 사람은 나사에 관련된 행사에서 방문해 기념품으로 NASA가 새겨진 티셔츠를 구매하고, 그리고 그 티셔츠를 실제로 입고 다닌다. 미네소타 대학에 다니는 사람은 Minnesota University라고 새겨진 티셔츠를 구매하고, 평상시에 아주 잘 입고 다닌다. 미국인들은 (혹은 외국인들은) 서로가 뭘 입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각자 개성대로 입고 다니기 때문에 단체 이름, 브랜드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를 평소에도 잘 입고 다닌다. 만약 한국에서 어떤 브랜드 컨퍼런스에서 기념으로 받아온 티셔츠를 평소 친구와 번화가에 위치한 카페를 갈 때 입고 갈 수 있는가? 난 웬만하면 못 입고 간다에 한 표 건다.


미국에선 영문 프린팅 티셔츠를 살 때 영문 레터링의 의미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서 구매할 필요가 있다. 이상한 뜻이 쓰여있으면 이곳 사람들은 정말로 정보 그 자체로 인식해버리니까 오해 아닌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한국도 이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런데 한편으로 재밌는 소스로 활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티셔츠를 입은 사람과 티셔츠에 새겨진 정보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니, 되려 내 관심 분야의 티셔츠를 일부러 입어 보는 거다. 나의 관심사를 만천하에 알리는 느낌으로! 미국인들은 스몰토크를 좋아하니까 티셔츠로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서로 티셔츠를 보고 '오. 너 여기에 관심 있구나!' 하면서 말이지.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 각자 관심 있는 것이 새겨진 프린팅 티셔츠를 입고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언젠가 열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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