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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lee Jun 19. 2019

오타루를 기억하며

러브 레터 / Love Letter

일본 홋카이도의 오타루... 이 작은 도시 다녀오신 분 많습니다. 영화 하나가 일본의 아주 작은 도시를 특히 한국인에게 핫 플레이스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근 20년 동안 지속된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 모릅니다.


제가 오타루를 다녀온 건 1990년도였습니다. 이와이 슈운지의 영화 '러브레터'가 만들어지기 전... 오타루의 모습...  당시에는 굉장히 허름하고 어둡기 그지없었던 운하 천변도 노란 나트륨 등으로 분위기 그윽한 운하로 탈바꿈했더군요.

Photo 오타루 시 공식 홈페이지.

제가 오타루를 배경으로 한 이와이 슈운지의 영화 '러브레터'를 본 것은 1999년도 12월이었습니다. 그것도 늦은 밤, 일본의 호러물 영화 '링'의 관객 초청 시사회를 끝내고 온몸을 감싸는 그 음습한 분위기를 떨쳐내기 위해 러브레터 마지막 회를 골랐습니다.  


한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일본 스타 감독의 영상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고즈넉하게 감상하다 보니 흰 눈에 쓰러지는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의 해맑은 웃음에 또 제 마음이 설레더군요.


내게도 저런 때가 있었지... 조금 서글펐습니다.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베로부터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 오타루(小樽)'라는 자막이 나오더군요. 그래요. 오타루라는 단어를 본 순간 마치 여주인공이 자신의  첫사랑이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오타루를 찾아가듯, 저도 잊고 지냈던 1990년의 제 모습으로 플래쉬백 되었다고나 할까요?


삿포로 중앙역에서 오타루행 기차를 타고 다시 내려, 두 칸짜리 기차를 타고 찾아 나섰던 아리스 팜의 기억. 바다와 거의 붙어있는 철길 따라 파도를 맞으며 달리던 작고 예뼜던 두 칸짜리 기차에서 노란 수첩에 무언가를 긁적이던 그때 20대 후반의 내 모습이 마치 객관화된 제 삼자의 모습으로 아직도 제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알래스카 스워드(Seward)를 여행할 때 아담한 목조주택과 바다를 감싸는 낮은 안개를 온몸으로 맞으며 갑자기 1990년 오타루에 있던 나의 기억 속으로 끌려들어 간 듯했다.


당시에는 저 역시 오타루가 어떤 곳이었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갔을 때가 5월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날씨가 쌀쌀하고 눈발이 날리더군요. 기온이 낮아서 그런지 거리는 아주 썰렁할 만큼 깨끗했던 게 인상이 남습니다.


아! 또 인상이 남는 게  하나 있네요. 오타루는 당시 조총련 세력이 강한 곳이라 재일교포 여학생들이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 조총련계 학교를 다닌다는 걸 알았습니다. 오타루 시내를 걷다 보니 한복 차림으로 등하교를 하는 학생들을 직접 보았었죠.

이 항구도시에서 김일성의 생일잔치 때 쓰기 위하여 많은 물건들을 싣고 북한으로 떠나는 배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왜 이렇게 오타루에 대해서 궁금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영화 '러브 레터'의 영향이 큽니다. 하지만 그 보다... 제가 정말 이 도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읽어보신 분들도  많겠지만 일본 만화 『미스터 초밥왕』을 읽고 나서입니다. 기억나세요. 주인공 쇼다의 고향이 바로 오타루였다는 거?


아버지가 애써 일궜던 초밥집이 거대 프랜차이즈 초밥 체인의 음모에 넘어가 문을 닫게 되자 쇼다가 일류 초밥 기술자가 되기 위하여 병든 아버지와 가슴에 품었던 연인, 미도리를 두고 떠나온 고향 말이죠. 그  고향이었단 말이죠. 정말 의리 있고 잘 생기고 그것도 모자라 세세한 마음 씀씀이까지  꼭 제 이상형(?)이었던 바로 쇼다의 고향이 오타루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는 일본인의 정서에서 오타루라는 곳은 어떤 곳일까  참 궁금해졌습니다.

학산문화사에서 발행된 미스터 초밥왕 1권 표지

그때부터 오타루를 찾아봤죠.  ‘야후 재팬’에서 찾아보니 홋카이도의 작은 항구 도시. 메이지 시대부터 오타루가 위치한 이시카리만의 석탄을  캐내 도쿄로 이송하기 위하여 부두가 발달됐고 사할린 등의 연해주와 인접한 지리적 여건상 러시아와의 교류가 활발하다고 적혀 있더군요.  

 

그리고 '러브레터'에서도 잠깐 배경으로 나왔었지만 사카이마치도리에 있던 유리공예 박물관이 유명하죠. 저도 이 영화에 등장했던 유리 공예  박물관에 가서 유리창에 달라붙어 그 아줌마 아저씨들이 입으로 불어  만들어내는 기기묘묘한 여러 가지  고양이며 사슴, 강아지 등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런데 말이죠. 제가 또 『여제』(이건 19세 미만 구독 불가입니다)라는 일본 만화를 읽다 보니까 비록 여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꽤 비중 있는 조연, 호스티스의 고향이 또 오타루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그때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죠. 오타루라는 곳이  우리나라로 치면 온갖 역경을 딛고 일어나 마침내 인간 승리를 일구어낸 그 어느 고장(?) 같은 일본의 그런 곳은 아닐까 하고 말이죠.


제가 이렇게 오늘 장황하게 일본의 어느 작은  항구 도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던 건 아주 단순하게 제가 가보았던 그곳을 영화와 만화의 한 배경으로 만나보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한다는 건 어차피 피상적일 수밖에 없죠.


하지만 새로운 문화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한없이 제가 참 모자라고 제 지식과 안목이 깊지 않고 얕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조금은 겸허해지고 계속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되는 거겠죠.


오늘 밤은 눈 덮인 산을 바라보며 '오깽끼 데스카'를 외치던 나카야마 미호처럼 오타루로 가던 그 두 칸짜리 기차에서 수첩에 뭔가를 끄적거리던 20대 후반의 제가, 2019년을 살아가는 저에게 안부를 물어봅니다.  


'오깽키 데스카?'

'와다시와 오깽키 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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