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lee Jun 06. 2019

이 글은 관능적인가?

병속에 담긴 편지


저와 가까운 몇 분들께 제가 쓴 글을 보내드렸더니 너무나 관능적이고 도발적이라는 과찬(?) 아닌 과찬을 해오셨습니다. 저는 평소에 워낙 관능적이지 못한 관계로 제가 쓴 글을 다시 한번 살펴보며 이 분(?)에 넘치는 평가가 사실이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저는 이 글이 관능적인가?라는 의문을 잠시 하며 이 사회에서 요구되는 관능이라는 단어에 대해 잠깐 집고 넘어가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제 주위에는 여자들이 많습니다.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다 혼기를 완전 놓친 환갑 넘기신 분,  그리고 아직도 젊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사는 4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의 아가씨들까지... 제 주위에는 늘 여자로 북적거리죠.


결혼한 여자, 결혼 안한 여자, 결혼한 여자도 집에서 살림만 하는 전업주부에서부터 직장 생활을 하며 꽤 인정받는 전문직 여성, 경단녀 등등 온갖 종류의 여자들이 많습니다. 저요? 저는 지난 2018년 11월 까진 직장을 다녔지만 지금은 모종의 다른 계획을 갖고 잠시 망중한(?)을 즐기는 백수입니다. 백수 과로사란 말도 있던데 백수지만 매우 바쁩니다.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가서 1년 과정 공부에도 등록을 해서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틈틈이 서울시에서 설립한 서울50플러스 재단에서 하는 클래스도 호시탐탐 살펴보며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좀 스스로에게 대견한 부분인데 비영리법인에 가서 자원봉사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자원봉사를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줄곧 일해왔던 글쓰기의 재능(?)을 기부하는 형식이라 좀 간지럽긴 하지만 그래도 단체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홍보물 작성과 문구 수정, 사업제안서 수정까지 열심히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한 가지... 위탁시설의 보호자나 아이들이 보내온 원고를 손보면서 제가 작은 힐링의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자원봉사를 하는 저의 이 상황이 너무 감사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느라 제 손으로 직접 키우지 못했던 딸 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이들이 보내온 원고를 읽으면서 다시 일깨워지기 때문입니다.  


성장한 이후에도 저와 갈등을 겪고 있는 딸아이에게 다시 한번 미안하고 속죄하는 마음을 갖게 되죠. 그리고 이런 기회를 갖게 해준 자원봉사 시간이 오히려 감사해지고 또 감사해집니다.  


좀 이야기가 옆길로 샜습니다. 오늘 글은 관능의 주체와 객체로서의 여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시작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여성이 20대만 넘으면 썩은 준치 대우를 하는 왜곡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소위 그들의 규정에 의해(?) 한물간 여성이 바로 노처녀와 아줌마 군단입니다(이는 제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힙니다).


예전에 한창 유행하던 미시족이라는 단어도 사실 따지고 보면 아줌마이지만 아줌마이고 싶지 않은 아줌마들의 심리를 잘 포착한 유효 적절한 광고 기법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커리어우먼 혹은 워킹우먼이란 단어는 조지 아르마니 슈트를 매끈하게 차려입고 하이힐에 탱탱한 종아리를 드러낸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니 왠지 은밀한 상상력이 발동되는 건 저의 과민반응일까요?


관능이란 단어는 굴곡 있는 몸매와 볼그스레하게 상기된 볼, 그리고 촉촉하게 젖어드는 목소리... 뭐 이런 단어들로 지금껏 규정하지 않나 싶은데 이런 이미지는 이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계시는 남성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된 20대의 스펙트럼을 가진 여성의 이미지라고 생각되네요.


하지만 저는 좀 관능이란 단어를 누군가를 평가하는 객관적인 판단의 단어로 생각하지 않고 나의 상태를 나타내는 주관적인 느낌의 단어로 정의 내리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든지, 누군가를 쓰다듬고 보듬고 싶다든지 이것을 관능이라는 단어로 규정한다는 거죠.


만약 이런 설정을 하게 된다면 아마 한국의 아줌마들은 세상 최고로 관능의 화신일 겁니다. 왜냐하면 아줌마들은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싶어하고 보듬고... 쓰다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은, 더욱이 일상의 삶들은 이런 아줌마들의 관능을 녹녹하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아줌마의 관능이 한층 깊이 있게 녹아나는 영화가 1999년에 개봉된 '병속에 담긴 편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흔히 케빈 코스트너의 영화처럼 언론에 소개되었습니다.  1991년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로 아카데미상을 휩쓸 때만 해도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던' 배우 중 하나였던 케빈 코스트너가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다 그 당시 최대의 위자료를 주며 아내와 이혼하고 그 후 제작자로서 참여했던 작품에서 계속 실패하면서 최악의 순간을 맞아 선택하게 된 배역이라죠.


그가 선택한 역할이 한 여자에 대한 애정을 그녀가 죽어서까지 순수하게 지키려고 하는 '개럿'이라는 건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면서 아이러니 하게 느껴지는 대목이지요.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바로 테레사역으로 출연했던 로빈 라이트 펜입니다(마돈나의 전남편이었던 숀 펜의 부인 말이죠).


자신의 클라스 메이트와 결혼했지만 세월이 지나 다른 여자와 자신을 일년간이나 동시에 소유하며, 게다가 그 기간 동안 자신과 둘째 아이 출산을 진지하게 의논하며 이중생활을 즐기던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허탈함에 살아가던 한 아줌마가 다시금 사랑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여는 상처받은 영혼의 사랑 이야기죠.


우리가 외신에서 자주 접하는 '시카고 트리뷴'지의 자료수집가 '테레사'는 빌딩의 숲, 시카고에서 아들과 단 둘이 삽니다. 휴가를 맞아 전남편에게 아들을 보내면서 전남편과 아들, 그리고 일년동안 남편을 공유했던 그 여자와 그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가족을 보며 씁쓸함을 느끼죠.

 시카고 트리뷴지의 자료 조사 기자로 일하던 테레사는 빌딩 숲에 파묻힌 시카고에서 옛 사랑의 상처를 홀로 핦으며 아픔을 달래고 있었다. photo by Myoung Ae Lee


테레사의 휴가지는 케이프 코드라는 바닷가. 이곳에서도 예의 수다스런 룸 서비스 아줌마는 아는 체를 하며 테레사에게 계속 새로운 남자를 만나볼 것을 권유하지만 테레사의 마음은 닫힌 채 열리지 않습니다. 무료하고 나른하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테레사는 조깅을 하던 바닷가에서 마침내 모래더미에 빼곡히 올라온 병을 발견하고 병 속에 담긴 편지를 읽게 되죠.


편지는 어떤 남자가 캐서린이라는 죽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애절한 사랑의 마음을 오래 된 타자기로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진실한 사랑이 담긴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고 또 읽어보고... 남자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에 가득 차, 꽁꽁 얼어붙었던 테레사의 마음 한 자락이 서서히 녹기 시작합니다.

https://youtu.be/UY_cnHPhw60

Message in a Bottle Theme - Storm(Gabriel Yared)  Daybreak YouTube

테레사와 입사 동기이지만 좀 심하게 나대는(나댄다는 말 아시리라 믿습니다) 스타일로 보여지는 테레사의 상사는 이 편지를 자신의 칼럼에 게재하여 자신의 주가를 높입니다. 물론 이 상사의 성취욕으로 인해 시카고 트리뷴지에는 메마른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여자들의 절절한 사연이 담긴 편지와 격려의 회신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고 이 편지와 동일한 사람이 쓴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편지 2통이 독자들의 손에 의하여 테레사에게 건네지게 되지요.


테레사는 'G' 라는 이니셜을 쓰는 편지의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는 그 순수한 사랑에 매료되어, 업무를 핑계삼아 그를 찾아 나섭니다. 병으로 아내를 잃은 후 바닷가 외딴집에서 혼자 살며 요트를 수리해주고 살아가는 개럿. 하지만 개럿은 결코 혼자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죽은 지 2년이 지났지만 지금 막 의자를 떠난 듯, 아직도 가지런히 놓여진 아내의 신발이며 그림을 그리던 아내의 그림 도구에 짜여진 물감, 수납장에 그대로 놓여진 아내가 좋아하던 투명한 병들, 코르크 마개들... 집안은 마치 그의 아내가 그대로 앉아 그림을 그리다 잠시 잠깐 자리를 비운 것같이 보존되어 있죠.

아내가 좋아하던 투명한 병들, 코르크 마개들... 집안은 마치 그의 아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듯 보존돼있었다. 사진 출처 /  IMDB Message in a Bottle


자신을 너무도 잘 이해하는 테레사에게 차츰 마음을 열게 되는 개럿과 그의 순수함으로 마음 속 상처가 조금씩 아물게 되는 테레사는 짧은 시간에 쉽게 친근함을 느끼고 사랑의 감정에 빠지게 되죠. 하지만 개럿은 자신이 아내 이외에 다른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 그녀와 시간을 함께 한 것 때문에 아내에 대해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개럿을 좀 모자라고 멍청한 남자라고 생각할 겁니다. 주로 남자들이겠지만 말이에요. 그리고 아마도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여자들은 나도 저런 사랑의 대상이었으면 좋겠다는, 현실에서는 절대 이룰 가능성이 없는 헛된 꿈을 꾸겠죠? 그리고 캐빈 코스트너의 상처를 도닥이고 싶고 그의 쓰린 가슴을 어루만지고 싶은 관능적인 마음을 갖고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캐롤라이나 주의 바닷가에서 짧지만 농밀한 휴가를 보내고 온 테레사는 자신을 소외시키던 거대한 빌딩의 숲, 시카고에서 활기찬 생활을 하며 개럿의 전화를 기다립니다. 하루하루가 그를 사랑하는 감정에 푹 빠져 온통 즐거운 일들뿐입니다.  마침내 테레사를 만나러 캐롤라이나 그 한적한 바닷가에서 시카고로 비행기를 타고 온 개럿, 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도회적인 일터에서 일 하는 테레사의 일상이 참 그녀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자신과 어울리는 여성인가를 갈등하게 되지요.


이건 예전에 제가 보았던 발 킬머 주연의 '사랑이 머무는 풍경' 에서도 느꼈던 그런 감정입니다(마치 제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 하군요). 눈이 안 보이지만 풍부한 감성과 직관적인 판단력이 뛰어난 안마 치료사 발 킬머는 휴양지에서 안마를 해 주던 중, 자신의 섬세한 감성을 알아주고 대화가 통하는 여성 건축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죠. 안마 치료사와 여성 건축가... 어울리지 않는 그들은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면서 사랑을 이루어가는데 그 과정이 참 가슴 시렸습니다.


하여간 개럿과 테레사의 앞에 놓인 현실은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이 써서 보낸 편지와 병, 그리고 자신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게 된 개럿은 자신이 놀림감이 됐다고 생각하며 테레사의 집을 뛰쳐나옵니다. 물론 오해는 풀리지만 자신이 보낸 편지는 두 통 뿐인데 테레사가 보관하고 있는 세 통 중의 나머지 한 통은 캐더린이 자신에 대한 사랑을 써서 바다에 띄워 보낸 것임을 알고 복받쳐오르는 그리움을 억누르지 못하죠.   

 

캐롤라이나로 돌아가 캐더린이 그려준 배를 모델로 삼아 캐더린호를 건조하는 개럿, 그 배의 진수식을 조촐하게 진행하면서 진수식에 테레사를 초청하지만 그 자리는 테레사가 아닌 캐더린만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시카고로 허탈하게 돌아온 테레사에게 남겨진 것은 개럿의 사고 소식과 '이제 캐더린, 당신만큼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오?'라는 병속에 담긴 개럿의 편지였죠.


이 영화를 제가 제대로 읽어드렸나요? 우리 나라는 모든 문화가 10대나 20대 위주로 편성되어 있죠. 음악은 더욱이 그러하고 영화나 잡지, 모든 분야에서 말이죠. 그렇지만 이는 전혀 문화 생활을 하지 않는 우리 아줌마들, 그리고 아저씨들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병속에 담긴 편지'와 같은 이런 영화는 전혀 흥행에 성공할 수 없죠. 왜냐하면 이런 영화는 아무리 20대 연인들이 보아도 그저 드라마일 뿐이고 내가 공감할 수 없는 미래의 감성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왠 죽은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는 순수를 가장한 유치? 뭐 이런 느낌들을 갖지 않겠어요. 하지만 저 역시 만약 결혼을 하지 않고 그냥 직장이나 왔다갔다 다니고 사람에 부딪혀 상처받고 갈등을 겪어내지 않았다면 영화의 이면에 흐르는 저만의 감성들을 느낄 수 없었겠죠.  


예전에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같은 경우, 중년 여성의 불륜이라는 묘한 사회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아줌마 관객들을 극장으로 몰았다지만 이제는 굳이 불륜이라는 단어가 우리 주위에 너무 흔한 이야기들이 되어버려 아줌마들을 극장 안으로 유인할 만큼 메리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하여간 아줌마들이 제대로 대접받고 인정받으려면 저는 그렇습니다. 아줌마들의 감정이 느껴지는 문화적인 상품에는 자신의 의견을 좀 피력하고, 물론 저 같은 약간 이상야릇한 주관적인 의견이라도 말이죠. 아줌마만의 문화적인 장르(소비 지향적인 것들 말고 말이죠)도 좀 열린 공간, 그리고 열린 매체로 봇물 쏟아지듯 쏟아져 나왔음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그래서 아줌마의 관능이라는 좀 도발적인 소재도 아무 거리낌없이(지금도 별로 거리낄 건 없지만 말이죠) 인터넷에 올릴 수 있고 논의될 수 있는 그런 문화적, 사회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면 좋겠다는 거죠. 왜냐하면 저는 생각하는 것들을 진솔하게 가감 없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세상이 사람답게 사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말이죠.


역시 제 글 도발적인가요?

매거진의 이전글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