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세상이라는 힘든 파도를 온몸을 다해 헤쳐 앞으로 나아가다 더 이상 팔을 젓지도 못하고 발도 파닥이지 못할 만큼 힘들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일명 '무기력증'에 빠진 것이다. 마치 저 바다 밑바닥에서 누군가가 날 잡아끌며 ‘이젠 가라앉아도 된다’며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하다.
이럴 때 우린 긴장한다. 그 속삭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감이 잡히니 말이다. 내 정신이 불안감에 지배되려 하는구나...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를 다독여야 한다. 이윽고 마음의 짐을 벗어던지듯 나를 긴장시켰던 것들을 놓아버렸을 때 우리 몸은 바다 위로 떠오른다.
잔뜩 긴장한 내 근육들을 이완시켜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를 바다 위로 떠오르게 만들어주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의 위안을 걱정하는 누군가의 진심 담긴 따뜻한 말 한마디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내가 이 버거운 인생을 살아내면서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따뜻한 말 한마디' 있었을까?
생각을 모아보니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니라 '따뜻한 글 한 구절' 기억이 난다. 딸아이로부터 위로받았던 글들을 적어본다.
kakao talk
"요즘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24시간 엄마만 생각하고 있어"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나 다 알 수 없지만 엄마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Facebook
"So lucky to have this person in my life. Would you come back a million times to this life to be your daughter again?"
instagram
The woman who gave up her all for me. Moved thousands of miles away from her home, worked 8am-11pm every day for13+ years in a xenophobic society, sat through years of my terrible ignorance and stupidity... Miss you every day even though you always dressed me to look like Pillsbury Doughboy or British soldier. 너무너무 사랑해, 엄마~~~~ 맨날 엄마 생각하고 있음.
딸아이가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문장. 이 문장을 읽으며 딸아이 고민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됐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미국의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제1 언어는 영어다. 한국어가 제2 언어가 된 것이다. 미국에서 초중고에 대학까지 나름대로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딸아이 역시 아등바등 힘들게 살아왔다.
위의 글들은 딸애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을 막 시작할 때쯤 엄마에게 카톡으로 보냈거나 본인의 sns에 올렸던 것들이다. 이때 딸아이는 UC (캘리포니아주 공립대학) 계열 학교의 소수민족 학생들 모임을 만들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샌디에이고까지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이 모임에서 소수민족 학생들이 모여 공부를 하면서 여성학을 스터디하게 됐는데 그때 딸이 아닌 한 여성으로서 엄마의 삶을 바라보는 객관화 시기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나와 딸아이는 주로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카톡이 모녀의 대화를 한글로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소수민족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틀려도 한글로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하던 딸아이는 자신이 한글을 틀리게 쓰면 제대로 된 철자로 고쳐서 보내달라고 내게 부탁을 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한글이 좀 더 나아질 것 같다면서.
나는 회사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주관하는 행사 준비로 분주한 와중에 딸아이가 보내온 저 카톡 문구를 읽게 됐다. 그때 내 감정이란... 가슴 밑바닥에 단단히 자리 잡았던 딸아이에 대한 서운함, 힘듦, 심지어 밉기까지 했던 여러 가지 복합적인 정체모를 감정의 굳은 돌덩어리가 사르르 녹는 듯했다.
딸애의 엄마에 대한 감정 표현은 카톡뿐 아니라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서도 종종 이어졌다. 딸아이는 대학에 입학해서야 내가 요청한 페이스북 친구 수락을 받아들였다. 난 대학 생활을 하는 딸애의 모습을 페이스북에서 매일 체크하며 안부를 확인하곤 했는데 당시 나는 딸아이가 페이스북에 올렸던 윗글을 보면서 얼마나 눈물을 훔쳤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 후, 인스타그램에 윗 문구를 올렸다는 이야기를 조카를 통해 듣게 됐다. 조카는 이모에게 이 문구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화면을 캡처해서 보내주며 "이모, 수진이가 철이 들었나 봐" 위로의 말을 전했다.
아쉽게도 당시 나눴던 카톡을 보관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됐지만 나는 그 카톡을 열어 보고 또 열어 보고... 밤새 눈물 흘리며 딸애를 혼자 키우던 20년 세월의 아픔과 괴로움을 모두 보상받은 듯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홀딱 새웠다.
하지만 이후에도 우리 모녀는 아직 싸우며 산다. 다만 예전의 나는 딸아이가 엄마인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해서 딸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면 지금은 적어도 내 딸이 엄마인 나를 미워하지는 않고 애정은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해야 하나?
우리가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결국 ‘나의 주변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한다. 주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결국 그 기본은 ‘소통’ 일 것이다. 딸과의 소통 문제로 행복지수가 크게 낮은 내게 이 말은 금과옥조 같았다.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결국 소통 못하고 불통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만나는 가족부터 학교 혹은 직장에서 친구와 동료라는 이름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이들로부터 더 많은 상처를 받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내가 주고 있진 않은지?
행복지수는 소통지수와 비례한다고 하는데 나는 결국 딸아이와의 소통에실패한 엄마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와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도 못했고 힘들고 스트레스받는다며 아이의 작은 잘못에도 크게 화를 내며 나의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분풀이 해왔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제 와서 너무 늦은 후회지만 딸아이를 키우던 예전의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엄마 노릇을 예전보다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관계에 있어서 놓쳐서는 안 될 것 두 가지, 공감과 배려… 이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실천법을 배워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우린 인생의 갈림길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한다. 이 갈림길에서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가 겪고 있는 힘듦과 어려움을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동력이 된다면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그까짓,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당신도 나도, 우리들 모두…
광주의 기품 있는 한옥, 오가헌에서 차 한잔을 마시며 가슴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의 행복한 순간이었다. Photo by ma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