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으로서의 글쓰기
36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주한 후, 19년을 미국에서 살다 귀국했다. 고백하건대 한국에서 유년 시절이며 중고등학교 대학 졸업에 직장생활을 12년 넘게 했으니 내 삶의 자양분은 완전 한국의 문화다.
자양분을 떠나 이식된 타국에서의 삶은 제대로 그 나라의 문화를 즐길 만큼 여유 있지 못했다. 매월 따박따박 납부해야 하는 월세에 각종 공과금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준비금으로 남겨놓아야 하는 보험까지 한 달 단위로 가계부를 옥죄는 미국의 고물가에서 아이 키우며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은 일하는 직업의 특성상 미디어에게 제공되는 초대권으로 뮤지컬이며 전시회 등등을 기웃거리는 것으로 메말라가는 감정의 속도를 간신히 늦춰왔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은 이민자가 구사할 수 있는 영어란 여전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뮤지컬을 보고 연극을 보고 전시회를 가서 작가를 만나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자괴심으로 작품들을 만나도 감정의 울림이 없어 더욱 괴로웠다.
그럴수록 깊어만 가는 두고 온 것에 대한 그리움은 다름 아닌 한국의 문화들이었다. 내가 귀를 쫑긋하지 않고 온갖 정신을 집중해서 듣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고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문화유산과 대중문화에 대한 갈망이 차츰 커져 어쩌지 못할 정도였다.
이때쯤 나의 한국에 대한 관심을 폭발시킨 것은 전적으로 TV 프로그램이었다. 2018년, tvN에서 방영된 ‘알쓸신잡’ 시즌2에 등장한 안동의 병산서원은 한마디 속된 말로 나를 그냥 ‘뿅’ 가게 했다.
유현준 홍대 건축학과 교수가 새로운 패널로 등장했던 시즌 2에서 알쓸신잡 팀이 방문한 안동 병산서원의 기품 있으면서 수려했던 자연경관과 서원의 조화는 미국 이민생활에서 지칠 대로 지쳐 황폐화되고 있던 내게 큰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살 때에는 전통문화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한국으로 다시 되돌아온 후, 한국의 사찰을 다니고 국악 공연에 서원까지 다니게 된 배경에는 이런 갈증과 목마름이 아마 폭발했기 때문이리라…
미국에서 여행을 떠나려고 계획을 세울 때에도 늘 먼 나라만 기웃거렸었다. 내 고향은 정작 가본 곳도 별로 없으면서 말이다. 나는 내가 가보지 않았던 고국의 땅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밟아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지난 3월 전남의 담양, 화순, 광주, 보성, 순천 지역 여행에 뒤이어 7월에는 강원도 영월과 경북 영주와 안동 지역을 여행했다.
특히 안동 지역의 여행에는 서원을 포함시켰는데 마침 병산 서원을 포함해 도산 서원과 소수 서원 등 안동에 위치한 서원 세 곳을 포함해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터라 목적의식이 뚜렷한 향학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
오랜 대학 친구와 선배까지 의기투합한 이번 안동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라 해도 서원 코스였다. 미국 시카고에서 날아온 이들을 픽업해 경북을 향해 떠나는 여행길은 가벼운 흥분으로 가슴이 콩콩 거렸다.
'아~ 마침내 경북 땅을 한번 밟아보는구나!!' 생각해보니 한국에 살면서 경상북도를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반도 지형을 똑같이 닮은 강원도 영월 선암마을에서 한반도 지형을 구경하고 뗏목을 타고 흐르는 강물에 발도 담가 보았다. 단종 유배지인 청룡포를 둘러보고 늦지 않게 경북 영주로 넘어가야 했다. 청룡포에서 영주로 가는 길을 내비게이션에 넣었더니 김삿갓 계곡을 가르친다.
서늘한 김삿갓 계곡의 풍경에 이야기꽃을 피우며 운전을 하다가 우리는 갑자기 신세계로 인도됐다. 지도에서 도로가 어느 순간 사라진 듯 왕복 일차선도 아닌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숲 속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반대편에서 오는 차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차가 올라치면 차 한 대 겨우 갈 수 있는 길을 지나기 위해 반대편 차가 기다려주거나 아니면 우리 차가 기다려야 하는 그런 숲 속 오솔길을 달리게 된 것이다.
내비게이션은 계속 이 길로 가라 하고… 저녁 시간은 아직 멀었는데 갑자기 어두워진 이 길의 끝이 경북 영주로 통하긴 하는 건지 도저히 자신할 수 없었다.
약 1시간 정도를 더듬거리며 운전을 하고 나니 마침내 영주 부석사 이정표가 눈앞에 나타나며 갑자기 길이 넓어진다. 나중에 이 길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보부상들이 넘었다는 마구령이었다. 세상에나~ 내년에 이 길을 트래킹 할 것을 목표로 해본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부석사의 일몰을 보기 위해 부지런히 올라갔다. 애초 여행 스케줄에 거의 한 치 오차 없이 시간이 맞아떨어진다. 여행 일정이 이렇게 계획했던 대로 진행되면서 약간의 희열이 느껴진다. 하지만 여행의 맛이 또 이런 건 아닌데 아쉬움도 생긴다. 사람이 간사하다.
내일부터 펼쳐질 서원 파노라마를 기대하며 일찍 잠자리에 든다. 우리의 코스는 소수서원과 병산 서원을 거쳐 도산서원을 마지막으로 이육사 문학관을 방문하는 일정이다. 이른 아침 방문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규모도 컸고 관리 상태도 매우 모범적이었다.
‘이미 무너진 학문을(기폐 지학) 다시 이어 닦게 했다(소이 수지)’는 소수서원 소개의 첫 문장이다. 무너진 학문이란 더 이상 공부하지 않는 것과 동일한 뜻일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사는 이들이 많다. 물론 사유와 성찰로 책을 가까이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사회에 적응하느라, 가정을 꾸리느라 우리 스스로 연마를 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나를 연마하지 않는 시간에도 나이는 계속 먹는다. 나이 많은 것이 자랑이 아닌 세상이 됐다. 게다가 모든 것이 테크놀로지로 통하는 현대 세상에서 급변하는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고 뒷방 늙은이가 되지 않으려면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나이 듦이 완고함과 불통, 뒤처짐과 동일한 단어로 이해되는 한국 사회에서 평생 나를 연마해야 한다는 자기 다짐을 하며 소수서원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놓아야 할 것 세 가지. ‘시간’과 ‘나이’, 그리고 ‘고정관념’이라는 이해우 정신과 전문의가 말한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원숙하고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것. 사유와 성찰을 통한 평생 학습만이 정답이다. 아름답게 나이 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