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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lee Jun 06. 2019

불안과 권태가 부르는 일탈

구멍

오래된 한국 영화 '구멍'을 보았습니다. 최인호의 소설을 영화한 한 작품이죠. 저는 이 '구멍'을 소설로 먼저 읽었는데, 책 표지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그런 특이한 디자인으로 서점에 진열돼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죠. 소설가 최인호.... 그의 작품은 유난스럽게 영화화가 많이 되었죠. 그의 소설 문법이 영화를 만들기에 좋은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그의 작품은 예외 없이 영화로 만들어졌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습니다. 미끈한 오토바이에 엎드려 있었던가... 아니면 타고 있었던가... 하여간 장미희가 오토바이에 기대어 나른한 눈빛의 포즈로 길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던 포스터, '적도의 꽃'과 역시 장미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미스터 배'를 읊조려대던 영화, '깊고 푸른 밤'... 

구멍 속에서 불안과 권태가 부르는 일탈 Photo Daum Movie

 '깊고 푸른 밤'에서 장미희와 안성기가 벌이던 정사 신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 한국 영화를 보면서 '정사 신을 저렇게 외롭고 고독하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라는 느낌을 처음 갖게 했던 영화로 기억합니다. 물론 아직까지 한국 영화 중에는 그 영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하여간 유리창에 비쳐 도시의 불빛 속으로 사라지던 그들의 정사 신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죠. '육체적 관계도 세상과 소통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라고 말이죠. 






93년 칸느 영화제 감독상, 여우주연상과 9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과 조연, 각본상을 휩쓴 작품 Photo IMDb

'구멍'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또 '피아노'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영화 '피아노'에서의 이 구멍이 참 에로틱한... 그런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죠. 성적인, 그런 은밀한 상상력이 어떻게 구멍을 통해 표현되는지 '피아노'를 보다보면 이해할 수 있죠. 


벙어리 아다를 유일하게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피아노를 버리는 남편...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다를 사랑하게 되는 원주민 벤즈... 벤즈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면서 이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느끼죠. 


아다의 무릎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벤즈가, 아다의 스타킹을 뚫어놓고... 구멍은 점점 커지죠. 서로를 원하면 원할수록 커져만 가는 구멍... 그렇게 그 영화를 보면서 '구멍'이란 단어의 그 농밀한 은유성이 떠올랐던거죠. 


하지만 저에게 '구멍'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좀 특이한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거실 마룻바닥에 엎드려 틈새로 난 구멍에 눈을 대고는 그 어두컴컴한 밑바닥을 쳐다보거나 코를 대고는 그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퀴퀴한 냄새를 맡거나 했던 것이죠. 


특히 온 종일 비가 내리는 장마철에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배를 깔고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습기로 인해 더 축축해진 밑바닥, 어둠의 냄새를 맡곤 했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다 보면 어둠이 눈에 익숙해져, 거미줄을 타고 기어가는 거미... 제가 떨어뜨린 10원 짜리 동전... 구슬치기 하다가 툇마루 밑으로 굴러가 끝내는 찾기를 포기해야 했던 오빠의 유리 구슬... 뭐 이런 것들이 어둠 한편에 얌전히 앉아 저를 가만히 쳐다보는 듯 했죠.   

  

마치 내가 살고 있는 이 마루 위 세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듯, 나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상을 은밀하게 보는 느낌... 저 어둠의 밑바닥에서 금세 누가 뛰쳐나올 것 같은 두려움과 동시에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안도감을 동반한 호기심이, 빗줄기가 땅에 부딪혀 생기는 낮은 안개처럼 그렇게 온몸을 휘감곤 했었습니다.           


이런 좀 이상한 취향은 커서도 계속되었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지하철 환풍기로 빨아 올려지는 축축한 지하철 역사의 습기 어린 곰팡이 냄새가, 저를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려주곤 했었죠. 그러면 길을 걷다가도 환풍구에 올라 서, 그 시원한 바람에 함께 실려오는 냄새에 젖어... 추억에 젖고... 물론 요즘은 비오는 날, 걸어다닐 일도... 지하철을 탈 일도 없어 졌으니 당연히 우스꽝스러운 일도 하지 않지요. 


마룻바닥의 구멍을 통해 보여지는 밑바닥의 음습함과 그 음습함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주던 어둠과 장마철의 곰팡이 피는 냄새... 이런 게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구멍'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바로 영화 '구멍'이 제게 그런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권태로움에 찌든 40대 외과의사의 음습함... 어둠 속의 추악함... 익숙한 것에 대한 권태로움은 모든 일탈의 원흉인 듯 권태로워 이혼을 하고 권태로워 불륜을 저지르고 권태로워 폭력을 일삼고 결국 권태로움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이 시대의 모습들을 영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이 영화는 그리 잘 만들어진 영화도 연기자들의 연기가 눈에 띄는 영화도, 그렇다고 요즘 세대들이 좋아하는 카메라 워킹이 현란한 그런 영화는 더더욱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옛날 한창 유행하던 호스티스 영화 같은 느릿느릿한 템포로 이유가 납득되지 않는 권태와 불안에 시달리는 한 외과의사의 일탈을 그리 생생하게도 담아내지 못하는 어리숙한 영화라고 할 수 있죠. 


오히려 영화사의 홍보 문구처럼 세기말의 불안과 암울한 정서를 담아내려 했다는 그 예의 침에 바른 듯한 문구만 아니었다면 조금은 암울하게 그렇게 감상할 수 있었을텐데... 하지만 이런 미숙한 영화를 제 컬럼에서 소개를 하는 건... 저 역시 유치한 발상일지 모르겠지만 예전 한국영화를 보면서 가졌던 어리숙함의 편안함, 혹은 소박함을 이 영화에서 느꼈다고 할까요? 


주인공 '나'는 종합병원의 유능한 외과의사죠. 별 애정도 없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고 지금은 별거를 하면서 이혼 소송 중입니다. 하루하루 매일 사람들의 환부를 도려내고 꿰매는 일상적인 삶에 구역질이 나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다른 일을 하면서 살만큼 용기가 있지도 않습니다. 주인공 '나'의 생활은 매일매일 사람들의 환부를 째고, 가르고, 끄집어내고, 잘라내고, 닦아내고, 꿰매는...  지겨운 일들의 반복입니다. 


그의 유일한 취미이며 오락이자 소일거리는 낯선 여자와의 의미 없는 섹스와 수술을 하지 않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마시는 술뿐입니다. 여자는 섹스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하고, 남자는 쾌락을 추구하려 한다는 게 제 생각이지만 주인공인 '나'에게 섹스는 소통도 쾌락도 아닌 그저 지겨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죠. 


그에게는 얼마 전까지 한선영이라는 젊은 애인이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맹장수술을 받았던 여자 환자였지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섹스의 도구로만 생각하고 비정상적인 행동만을 일삼는 이 남자의 마음이 열리길 기다리다가 마침내 떠나버리고 맙니다. 


 '나'는 선영이가 곁을 떠난 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생각일 뿐 '나'의 진실인지는 역시 모호합니다. 하여간 '나'는 그녀를 찾아 나서지요. 그러나 그녀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내'가 찾는 한선영이란 여자는 정말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요?


 '내'가 찾아낸 한선영이 나와 얼마 전까지 함께 몸을 기대고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던 그 한선영이 맞기는 한 것일까요? 아니, 한선영은 내 욕망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꿈틀거리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을 때 내 앞에 나타났다가 다시 신기루처럼 사라져 욕망의 모호한 대상으로만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멈출 수 없는 욕망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와 같습니다. 나의 목숨을, 그리고 누군가의 목숨을 노리는 제어할 수 없는 자동차 말이죠. 마침내 기다리던 선영이의 연락을 받고 그녀를 만나러 가는 그 강렬한 욕망의 시간...  결국 '나'는 '나'의 차로 선영이를 치어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이 영화는 끝이 납니다.  


우리는 화면을 통해, 이유 없는 불안과 권태에 시달리는 나의 모습을... 불안과 권태가 크면 클수록 더욱 더 의미 없는 욕망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강렬한 욕망의 끝을 알고 있죠. 강렬한 욕망일수록 거기에 수반되는 고통 역시 크다는 것을.... 그리고 짧디 짧은 짜릿함의 순간 뒤, 나에게 엄습할 쓸쓸함과 허무함까지 말이죠. 


저는 강렬하진 않지만 일상적인 삶들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을 즐기면서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떨 때는 강렬한 욕망으로부터 유혹을 받을 때가 있지요. 그 욕망이 매혹적이면 매혹적일수록 제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 역시 크겠지요. 


저는 철이 없었을 때, 이 세상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진실이고,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들로만 이루어졌다고 믿었었지요. 어린 시절, 마룻바닥에 엎드려 본능적으로 터득했던 딴 세계의 존재를 잠깐 잊었던 거겠죠. 


내 밑에 또 하나의 세상이 있다는 걸 잊어버린 채, 내가 엎드려 있던 마룻바닥 위의 사실만을 믿었고 그 밑에 있는 어둠의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환한 대낮에 그 어둠들을 대면했을 때 어찌하여 이 환한 밝음의 세상에 이런 어둠과 어둠 속에서 기생하고 있는 거짓말들이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카펫 밑 어둠 속에 감추어진 거짓말들이 진실보다 더 많다는 것을 알아 버렸죠. 너무 멀고 먼 길을 돌아서.... 어렸을 적, 구멍을 통해 보았던 두려움과 호기심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그 어둠을 이제야 떠올리게 된 것이죠. 오랜 기간 잊었던 것이니 만큼, 적응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어둠도 제 일부라는 사실을 그냥 인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불쑥불쑥 이 어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죠. 시간이 흐를수록 어둠을 껴안고... 저는 그렇게 나아가리라는 사실을 말이죠.


불안과 권태가 부르는 일탈을... 이제 저는 어둠을 껴안는 넉넉한 자의 시선으로 거두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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