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적이진 않지만 창의적으로 사는 법
우리는 독창성과 창의성이 중요시되는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웬만한 일은 독창적이거나 창의적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무엇이 독창적이며 무엇이 창의적이란 말인가? 독창성은 아래와 같이 인터넷에 정의되어 있다.
독창성
다른 어떤 것에 유래하지 않고 그 자체에 기원을 둔다. 표절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을 존중하는 생각은 고대부터 있어 왔지만 개인의 창조력을 가치 기준으로 본 것은 르네상스 때부터였다. 15세기부터 화가가 자기의 작품에 서명을 시작하였고 18세기에 접어들어 확고하게 확립되었다. 1677년 프랑스에서 오리지날리테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였고 1742년부터 originality가 쓰였다. 1759년 영국의 시인 E.영의 《독창적 작품에 대한 고찰》이 출판되어 미학의 주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영은 자연에 뿌리를 내린 예술가에게서 독창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하며 그 작가가 아니고서는 만들 수 없는 것, 유례가 없는 작품에만 독창적인 작품으로 값어치를 매겼다. 따라서 빼어난 개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만이 지닌 창조적 특징이라고 하였다.
독창성이 갖는 찬양의 어감은 20세기 들어 수정을 받게 되었다. T.S.엘리엇은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절대 악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술가, 작가, 극작가는 자신을 키운 과거의 공동체 또는 전통에 힘입어 성장하였고 공유된 재료를 재구축하고 그것을 작가 자신의 무엇인가 새로운 것과 관련짓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예술이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재편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화가 폴 클리(1879~1940)도 엘리엇과 비슷한 견해를 보인다. 예술가란 나무의 대공과 같고 예술은 뿌리와 같다고 하였다. 뿌리는 언어이며 그 언어의 형식과 관습, 예술가가 계승하거나 획득하는 사회적, 문학적 체험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독창성은 동화(同化)와 변형의 과정에 있는 것이지 신기성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창조의 유기적 원리가 긍정적으로는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보다는 역사적, 문화적 흐름의 감각과 일체화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 창조를 무조건 강조하는 태도는 지나친 개인주의거나 신비주의로, 혹은 그 둘 다로 보여질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독창성 [originality, 獨創性] (두산백과)
창의성
‘새롭고, 독창적이고, 유용한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 또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거나, 비일상적인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능력’ 등 창의성의 개념은 매우 다양하다. 초기에는 창의성은 주로 유창성, 융통성, 독창성, 정교성을 포함하는 확산적 사고의 관점에서만 연구되었으나, 그 후에는 수렴적 사고와 확산적 사고를 포함하는 다양한 지적 능력, 인성, 지식, 환경의 총체적인 관점에서 연구되고 있다.
창의성은 의식적 사고, 노력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사고와 노력(부화, 통찰)의 영향을 받아 일어나기도 한다. 창의성은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 초인지적 사고, 의사결정 사고 등과 같이 여러 가지 사고 유형의 하나로 간주되기도 하고, 모든 사고 유형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가장 고차적인 사고능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의성 [創意性, creativity] (교육심리학용어사전, 2000. 1. 10., 학지사)
창의성은 위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잘 살펴보면 독창성이나 창의성은 거기서 거기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가만히 살펴보면 독창성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창의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물에서 약간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참 재미있는 사실은 창의성이 독창성을 이끌어내고, 독창성은 창의성과 늘 함께 다니는 성질임을 알 수 있다. 과연 이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있을까 싶지만, 늘 새로운 것이 눈을 놀라게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 본다.
많은 이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하여 독창적이거나 창의적이라 이야기 하지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의 변화가 모든 새로움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막연한 관념, 왜?라는 질문이 이 세상을 바꾸는 새로움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왜 자주 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쩌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바꾸거나 뒤집을 생각이 없거나 바뀌면 큰 일이라도 난다고 믿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 역시 횡설수설로 뭔가가 새로운 것이 나올 것이라 펜을 아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지만, 어쩌면 나 역시 지금의 편안함을 -사실 그렇게 편하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버리기 싫기 때문이지 않을까?
지금 나는 편안하지 않으면서 편안하다고 믿고 살아야 뒤처지지 않는 그런 삶을 산다는 착각에 빠져있기에 나는 아직까지 독창적이거나 창의적이지 않은 것 같다. 조만간 이런 편안함을 버릴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2017년 3월 2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길 바라나, 변화하길 두려워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