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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48시간

글자 도깨비

언어는 인간의 이성을 관장한다

by 말글손

오늘도 아침부터 전쟁입니다. 늦잠꾸러기 정훈이는 이불 속에서 발가락만 꼬물대고 있습니다.

“어이! 장정훈. 얼른 일어나라. 오늘도 헐레벌떡 서둘러야겠다.”

“아버지, 조금만 더 자면 안 돼요?”

“벌써 늦었다. 엄마도 출근하고 안 계시잖아. 우리가 급하다. 형은 벌써 다 챙겼다.”

“알았어요. 알았어.”

입으로는 투덜대고 있지만, 이불을 걷어 올리는 모습이 평소와 같습니다. 날쌘돌이 정훈이는 후다닥 씻고 나와서 밥을 먹습니다.

“형은 오늘 몇 시에 마쳐?”

밥을 먹던 정훈이는 훈서에게 말을 겁니다.

“나? 오늘 수요일이네. 2시에 마치지. 맞네. 아싸! 오늘 게임하는 날이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한 시간씩 마음껏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자유시간이지요. 요즘 친구들이 다 하는 게임을 아버지도 막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럼 난 한 시에 마치니까 내가 먼저 게임한다.”

정훈이도 게임할 생각이 벌써 신이 났습니다.

“이 놈들아, 머릿속에 게임 생각 밖에 없나? 아버지가 도서관 하는데 너희들이라도 책 좀 읽어야지.”

아버지는 늘 게임 생각하는 요즘 아이들이 걱정이라며, 짜증을 냅니다.

“책 많이 읽어요.”

평소에 책을 즐겨 읽는 훈서는 아버지 말에 은근히 섭섭합니다.

“그래, 알았다. 얼른 챙겨서 학교가거라. 아버지 나중에 강의 마치고 도서관 갈테니까 도서관에서 보자.”

이른 아침, 정훈이네 삼부자는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각자의 길을 갑니다.

“엄마, 내일 학교에서 학부모 교육 있데요. 오실 수 있어요?” 훈서는 엄마에게 안내장을 건넸습니다.

“정훈이는 아무 말 안 하던데. 정훈아.”

“네, 훈이는 오늘 안내장 없나?”

“있어요. 여기요.”

정훈이도 안내장을 가방에서 꺼냅니다.

“무슨 내일 교육인데 오늘 안내장을 주냐? 참, 학교도.”

“아니에요. 사실은 월요일에 준건데요. 까먹었어요.”

“어이쿠, 잘 한다. 5학년, 2학년이나 된 놈들이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니? 내일 엄마가 쉬는 날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엄마는 두 아들의 머리를 콩 쥐어박습니다.

“들어가서 일기 쓰고.”

“네”

시무룩해진 두 녀석은 방으로 쏙 들어갑니다.

“잘 됐네. 당신이 이런 교육에 좀 참여해야해.”

오늘따라 일찍 들어온 아버지도 엄마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아, 됐네요. 교육은 당신이 하고, 당신이 들으세요. 당신이 그 분야에 전문가잖아요. 전 제 일이나 잘 하렵니다요.”

엄마는 냉랭하게 톡 쏘아붙였습니다.

“아, 네. 그러세요.”

“교육한다는 분이 아들 독서 지도도 좀 안 해주나요? 훈서야 그렇다 치고, 정훈인 책을 안 읽는데 무슨 전문가에요?”

엄마와 아버지의 말다툼은 생각보다 오래 갑니다. 간호사인 엄마와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며 강의를 다니는 아버지는 서로 생각이 다릅니다.

훈서와 정훈인 작은도서관에서 친구들과 공부를 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공부도 아닙니다. 늘 무슨 활동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따라 쓰고, 글도 짓습니다. 자신이 지은 글로 발표도 하면서 함께 놀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오늘은 좌뇌와 우뇌를 골고루 발달시키는 훈련을 할 거야. 아주 간단하지. 왼손으로 각자가 고른 동시나 시를 한 편 따라 쓸 거야. 알겠지? 내일 토요일인데 틀림없이 게임에 빠질 것이니, 오늘 더욱 집중하세요. 알았나요?”

아버지는 친구들에게 최대한 예쁜 글씨로 글을 쓰라고 주문합니다.

“네.”

아이들은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금방 시끌벅적해집니다. 아버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하되 하면 된다고 늘 말씀하시니까요. 정훈이는 오늘따라 글이 더욱 싫어집니다.

‘도대체 이런 건 왜 시키신담? 빨리 예찬이랑 놀고 싶은데.’

“헤이, 장정훈. 글씨꼴이 이게 뭐야? 좀 더 정성을 들여 봐.”

“잘 안 돼요.”

“누가 잘 쓰라고 했니? 정성을 좀 더 들이라고.”

‘잘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 형들도 엉망이건만.’

개구쟁이 정훈이는 아버지의 잔소리에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주말이 되자, 정훈이와 훈서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오늘은 또 다시 찾아온 자유시간이 있습니다. 늘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게임까지 할 수 있는 자유는 그리 흔하지 않거든요. 아직까지 스마트 폰이 없어 엄마, 아버지 폰을 빌려서 게임을 해야 하니까요.

“애들아, 오늘 엄마랑 서점 갈까?”

“예? 엄마, 아버지가 도서관 하는데 서점에 왜 가요?”

평소와 달리 엄마가 서점에 가자고 하니 두 아들은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뭐, 살 책 있나? 대박이네. 당신이 서점에 다가고.”

아버지도 적잖이 놀란 표정입니다.

“호호, 오늘은 그냥 가만히 있어요. 엊그제 학교에 교육 다녀와서 조금 생각이 바뀌었어요. 애들한테 책 한 권씩 선물할거니까.”

“오늘은 엄마하고 서점 가서 너희들이 사고 싶은 책 한 권씩 사자. 엄마도 한 권 사고. 대신에 엄마가 추천해주는 책도 읽어야 돼.”

“네, 엄마. 대신에 갔다 와서 게임해도 되죠?”

아이들의 마음은 책보다 게임에 더 빠져있습니다.

“어이쿠, 녀석들. 서점 다녀와서 하면 되잖아.”

아버지는 아이들 말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래, 일단 게임은 갔다 와서 하자.”

엄마와 두 아들은 손을 잡고 오랜만에 서점으로 외출을 떠납니다.

“엄마하고 서점에 가니까 좋다.”

정훈인 들뜬 마음에 엄마를 올려다봅니다.

“아버지하고 자주 갔는데, 엄마하곤 처음이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손을 잡고 서점에 다닌 훈서도 엄마와 함께 가는 서점 나들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그래, 이번에 학부모 교육에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드네. 엄마도 이번에 생각을 많이 바꿨어.”

‘부모님들이 가장 많이 착각하시는 게 초등학교 학생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뇌는 이제 조금씩 성장하는 단계입니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경험이 더 소중합니다. 성적에 연연하다 보면 틀에 박힌 답을 찾는 훈련만 하죠. 결국에는 창의성도 떨어지고 학습능력도 떨어지게 됩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독서를 통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제일 우선입니다. 아이들이 책보다는 게임을 많이 합니다. 왜 그럴까요? 게임은 자신들이 선택하지만, 책은 대부분 부모님이 선택해 주기 때문이죠. 혹시 부모님이 이런 게임을 해라고 선택해 주셨나요? 그랬다면 아이들은 아마 그 게임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책을 직접 고르게 해 주세요.’

강사의 말이 엄마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정훈이가 고른 책은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고스트맨, 열쇠 구멍이 막혔다」였습니다.

“이야, 이 책 재미있겠는 걸. 보자. 서어 작가랑 김청엽 작가가 쓰고, 배성태 작가가 그렸네. 정훈아. 이 책을 왜 골랐어?”

아버지는 늘 이런 식입니다. 책을 읽을 때는 출판사랑, 작가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책을 고른 이유도 물어봅니다.

“뭐, 그냥. 고스트맨이라고 하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 주인공 닮기도 하고…….” 정훈이는 이런 어려운 질문을 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유, 당신은 그런 소리 마세요. 정훈이가 이 책 고르면서 얼마나 좋아했다고.”

“그치, 정훈아. 네가 읽고 싶을 때 천천히 읽어봐.”

“네, 엄마. 오늘 게임 안하고 이 책 읽을래.”

정훈이는 웃으면서 멋지게 아버지의 공격을 막아주는 엄마가 제일 좋습니다.

“정훈아, 오늘 게임 안 해도 괜찮아?”

훈서도 짐짓 놀란 듯 물어봅니다.

“응. 오늘 내 시간 형이 다해.”

정훈인 자신 넘치는 목소리로 게임 시간을 형에게 양보합니다.

“에이, 음. 그럼 나도 오늘 게임 안하고 책 볼래.”

둘은 오늘 산 책을 들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완전 대박인데. 녀석들이 이런 모습 진짜 오랜만이지 않나?”

아버지는 찡긋 눈을 감습니다.

“우리가 변해야 해요. 당신도 애들 그만 닦달하고 자유를 좀 주세요. 게임도 가끔 시켜주고, 책도 즐겁게 읽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매번 교육자니, 독서전문가니 하면서 꼭 우리 애들한테는 엄하게 하더라.”

“내가 뭐 언제는 게임 안 시켜 줬나? 흠, 흠.”

엄마와 아버지는 오랜만에 책을 보겠다고 자진해서 나서는 두 녀석이 무척 대견합니다. 아이이들 덕분에 부부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었습니다.

“그럼 우리도 오랜만에 아이들과 독서삼매경에 빠져 볼까요?”

엄마, 아버지도 책을 들고 살며시 방문을 엽니다.

“엄마, 고스트맨은 너무 길어요.”

책을 훑어보던 정훈이가 놀랐습니다.

“그럼 네가 읽고 싶은 거 먼저 읽어. 「열쇠 구멍이 막혔다」도 재미있지 않을까?”

“그래도 고스트맨 먼저 읽을래요.”

정훈이는 조용히 책장을 넘겼습니다.

-아연이 오빠는 조로증을 앓고 있습니다. 아연이네 가족은 아픈 오빠를 위해 시골마을로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그 마을에는 고스트맨이라 불리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고스트는 유령이지. 영화 「고스트라이더」를 봐서 알지. 히히. 그런데 조로증? 조로증이 뭐지?’

조용히 책을 읽어 나가던 정훈이는 이불 속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잠에 들자 엄마와 아버지도 불을 끄고 잠에 들었습니다.

하얀 세상에 정훈이는 혼자 서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저 멀리서 까만 물체가 흐느적거리며 다가왔습니다.

“안녕, 난 고스트이야. 조금 전에 네가 나를 불렀지?”

귀여운 꼬마 글자들이 정훈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아니, 난 너 안 불렀는데.”

“네가 조금 전에 고스트라고 했잖아. 날 안다면서.”

“아, 그래. 책 속에서 고스트가 나왔어. 내가 아는 말이라서 그랬지.”

“그래, 그래서 내가 온 거야. 네가 날 불렀으니.”

“그런데 넌 왜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본 고스트 모습이 아닌데. 그냥 글자잖아?

“네가 나를 글자로 보니 그런 거지.”

“그럼 넌 뭔데?”

“네가 날 부르면서 무슨 생각을 했니?”

“유령.”

갑자기 ‘고스트’라는 글자는 모습을 바꾸어 무서운 유령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아, 무섭게 왜 그래? 너 조금 전에 그 글자 맞아?”

“그래, 네가 내 모습을 이렇게 바꾼 거지. 하하하.”

“너무 무서워. 귀여운 유령도 있잖아.”

“이런 모습 말이야?”

고스트는 하얀 수건을 뒤집어 쓴 아기 유령의 모습을 변했습니다.

“훨씬 낫네. 영화에서 본 모습이랑 꼭 같네.”

“맞아. 내 모습은 네가 만든 거야.”

“무슨 글자가 모습이 있냐? 말도 안 돼.”

“흑, 그럼 넌 글자를 어떻게 읽니?”

“나야, 모양보고 읽지.”

“그래, 모양이나 모습이 바로 비슷한 말이지.”

“그래? 그럼 신령에도 ‘령’자가 들어가는데 비슷한 건가?”

“그렇지. ‘신령’ 신비한 힘이 있는 혼이란 말이고, ‘유령’은 떠돌아다니는 혼이란 말이지.”

“히야, 신기한데. 그럼 ‘산신령’은 산에 사는 신령인가?”

“그렇지. 바로 그거야.”

“그럼 고스트는 도깨비도 되지 않나?”

정훈이는 만화책에서 본 도깨비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갑자기 고스트는 머리에 뿔난 도깨비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으아, 도깨비다.”

“네가 날 만든 거라니까. 이 모습은 원래 일본 사람들이 보는 요괴의 모습이야. 네가 아직 모르지만, 우리나라는 그냥 사람의 모습이야. 그런데 네가 우리나라의 도깨비 모습을 보지 못해 날 그려내지 못한 거지. 정말 아쉽다.”

“뭐? 내가 아는 도깨비가 일본 사람들이 생각하는 요괴라고? 왜 그렇지?”

“그건 아마 우리의 역사를 잘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깨비를 이렇게 생각할 거야.”

도깨비는 술병을 들고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이야, 신기한데, 일본 요괴보다는 이 모습이 훨씬 낫네.”

“이 모습은 일부러 내가 변한 거야. 원래는 네가 모든 것을 생각해야해.”

“그럼, 아까 ‘조로증’이란 말이 있던데 그건 뭐야?”

“조로란 말은 나이보다 일찍 늙는다는 말이고, ‘증’은 그런 겉으로 드러나는 상태나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지.”

“그럼 전에 아버지와 조조할인은 일찍 영화 보러 가면 할인해준다는 말이야?”

“그렇지. 바로 그거야. 아주 똑똑한데.”

“늙을 ‘노’자는 훈서 형 마법 천자문에서 본 거 같아. 그럼 ‘노력’은 늙은 힘인가?”

“그건 아니야. 그 때 ‘노’는 힘을 쓴다는 말이야. 그래서 ‘노력하면 된다.’는 말이 있지.”

“오케이. 좋아. 그럼……. 어? 어디가?”

“오늘은 너무 늦어서 안 되겠어. 아침 해가 밝아오려고 해. 너도 이제 일어나야지.”

“어떻게 하면 다시 만나지?”

“네가 글을 읽으면서 글의 의미를 생각해봐. 그럼 그 글들이 말이 되고 뜻이 되어 다시 찾아올 테니까. 그럼 안녕.”

“잠시만!”

유령은 어느새 ‘고스트’라는 글자로 변해 다시 하얀 세상에서 서서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정훈아, 일어나라. 아침 먹자.”

오늘따라 아버지의 말투가 부드럽습니다.

“아버지, 어제 밤에 나 이상한 꿈을……. 아니에요. 형은요?”

“벌써 일어나서 씻고 있다. 씻고 오너라. 엄마는 출근했으니 우리끼리 먹자.”

정훈이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친구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비밀? 비밀이 이 뭐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인데. 아! 아버지가 숨겨두는 비상금에도 비자가 들어가네. 신기한데. 이거.’

아침부터 밥상 앞이 시끌벅적합니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아침을 함께 먹습니다. 평일에는 가족이 아침을 함께 먹는 일이 드무니까요. 현대는 다들 바빠서 그렇다고 부모님은 늘 말합니다. 일요일 아침은 여유 있게 가족이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어 정훈이는 기분이 참 좋습니다. 오늘은 3교대 근무하는 엄마가 안 계셔 조금 섭섭하긴 하지만요.

“아버지, 전에 아버지가 엄마 몰래 비상금이라고 숨겨 둔 돈 있잖아요.”

“그래, 있지. 혹시 엄마한테 말했니? 안되는데.”

“그게 아니라 비상금은 비밀스러운 돈이죠?”

“비상금은 급할 때 쓸 수 있게 미리 준비를 해 둔 돈이지. ‘비상사태’ 할 때처럼 비상시에 말이야.”

“엥? 그럼 비밀은요? ‘비밀’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렇지. ‘비밀’의 ‘비’는 ‘숨기다’라는 말이고, ‘비상금’의 ‘비’는 ‘아니다’라는 뜻이지. ‘비상’은 ‘평소와 같지 않다’라는 말이야.”

“신기하네. 고스트가 하는 말이랑 비슷해요.”

“누구? 고스트?” 아버지가 의아한 듯 물었습니다.

“고스트는 유령이란 말이지. 고스트라이더 할 때요.”

밥풀을 날리며, 훈서도 대화에 끼어듭니다.

“그럼 훈서는 ‘라이더’라 무슨 말인지 알아?”

“운전하는 사람이죠. 영화에서 봤어요. 고스트가 오토바이를 멋지게 타요.”

정훈이가 신이 나서 먼저 대답합니다.

“그렇지. 영어로 ride(롸이드)는 ‘타다’란 말이고 rider(롸이더)는 ‘타는 사람’이란 말이지. 말이란 게 다 이런 식으로 뜻을 만들어 가는 거야. 우리말이나 영어나 중국어도 꼭 같지.”

“그럼, 글자랑 말이랑은 다른 거에요? 고스트가 그랬는데.”

정훈이는 갑자기 궁금한 게 많아졌어요.

“그럼, 말은 소리고, 소리가 글자보다 우선이지. 소리, 즉 말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 글이지. 예를 들면, ‘바람’은 ‘공기가 움직이는 것’을 말하지. 그 의미를 소리가 아닌 모양으로 표시한 게 글자지. 글자는 그림과 같은 거야.”

아버지는 정훈이가 대견한 듯, 한껏 들뜬 소리로 설명을 합니다.

“아, 뭐……. 하하.”

정훈이는 얼렁뚱땅 넘겨버립니다.

오후에는 형과 배드민턴을 했습니다. 산은 새록새록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봄바람이 솔솔 부는 날이라 땀이 조금씩 납니다. 요즘 들어, 형이 조금씩 봐주면서 하니, 배드민턴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샤워를 하고, 방에서 뒹굴뒹굴 구르다 보니 영 심심합니다. 아버지는 오랜만의 휴식이라며 코를 골고 낮잠을 주무십니다.

“정훈아, 우리 게임할까?”

훈서가 아버지 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합니다.

“오늘은 하는 날 아닌데.”

“어제 엄마랑 서점 간다고 못했잖아.” 훈서가 조용히 정훈이를 꼬십니다.

“아니, 난 어제 보던 책 볼래.”

정훈이는 작은 방에 가서 책을 집었습니다. 잠이 들어 다 읽지 못한 책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아니, 오늘 밤에서 고스트가 찾아올까 벌써 기대가 됩니다.

“애들아. 엄마 왔다. 삼겹살 사왔으니 조금 있다 저녁 먹자.”

엄마도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 웃음이 한 가득입니다.

“다녀오셨어요? 엄마, 저 책 읽고 있어요.”

정훈이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말합다.

“어이쿠, 내 새끼. 책 보고 있었어? 아들이 책 읽는다고 하니 엄마가 기분이 더 좋네.”

“엄마, 내가 조금 전에 어제 못한 게임하자고 하니까, 책 본다고 게임 안 한데요.” 훈서가 엄마 귀에 속삭입니다.

“그래? 우리 훈이가 형 유혹을 잘 이겨냈네. 대단한데.”

엄마의 입 꼬리가 귀에 걸릴 듯합니다.

밤이 되자,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앉았습니다. 오늘따라 드라마가 너무 재미있습니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개그콘서트가 방영됩니다. 나란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데 갑자기 정훈이가 벌떡 일어납니다.

“아버지, 텔레비전은 무슨 말이야?”

“허허, 녀석. 오늘따라 이상하네. 텔레비전은 영어잖아. tele(텔레)라는 말은 ‘멀다’라는 의미고, vision(비전)은 ‘보다’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텔레비전은 ‘멀리 있는 현상이나 일, 물건을 본다.’라는 말이지. 우리는 지금 서울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거잖아. 물론 녹화 해 둔 건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을 보는 게 되고.”

“아버지. 저 개그콘서트 안보고 책 봐도 되요?”

“엉? 그, 그래. 그러자.”

“안 돼. 난 볼 거란 말이야.”

훈서가 갑자기 소리칩니다.

“좋아. 오늘은 어제처럼 온 가족이 책 읽는 시간을 가져보자. 완전 좋은데.”

아버지도 신이 나서 책을 들고 옵니다.

“에고. 갑자기 무슨 바람이람. 졸지에 나도 책 봐야 되네.”

엄마도 살짝 웃음을 짓습니다.

“아이고, 망했다.” 훈서의 한숨 소리가 방 안에 가득합니다.

-고스트맨과 친구가 된 아연이는 자연에서 신나게 뛰어놉니다. 도시에서는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경험입니다. 숲 속에서 만난 고라니도 정말 좋은 친구입니다. 아연이는 고스트맨과 함께 하는 시골생활이 정말 행복합니다. 그런데…….-

‘행복? 행복이 뭐지? 엄마, 아버지는 늘 행복해야지. 행복해야지. 하시는데. 복은 알겠는데 행은 뭐지? 행운 할 때 행인가?’

낮에 배드민턴을 많이 해서 그럴까요? 정훈이는 오늘도 스르르 꿈나라로 여행을 떠납니다.

“네가 날 찾았니?”

어제처럼 하얀 종이에 까만 글자가 꼬물꼬물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 넌 누구야? 아, 행복이구나.”

“그래, 난 행복이야. 안녕. 반가워.”

“반가워. 그런데 넌 왜 모습이 없어? 어제, 고스트는 모습이 있었는데.”

“하하하. 네가 아는 고스트는 네가 그려낸 모습이지. 실제로 유령을 본 적이 있니?”

“아니. 그냥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보면 뭐, 좀 귀엽기도 하고, 어떤 데는 무섭기도 하고.”

“그래. 고스트도 진짜 모습은 없어. 네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습이지. 나도 마찬가지야.”

“그럼, 행복은 어떤 모습도 없는 거야?”

“네가 언제 기분이 좋아?”

“나? 난, 그냥 가족들과 바닷가에 놀러 가는 거랑 같이 맛있는 거 먹는 거. 뭐 그런 일들이지.”

“바로 그거야. 행복이란 바로 내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야. 특별한 게 아니지. 네가 기분 좋은 그런 느낌. 그리고 일을 한다는 거야. 행복은 한자로 된 우리말이지. 한자로는 ‘다행이 복이 있다.’란 말이지만, 영어로는 happiness(해피니스)야. 여기서 hap은 ‘일’이란 의미야. happy(해피)는 알지?”

“당연히 알지. 아버지가 매일 아유해피? 하시는 걸.”

“그래, 맞아. happy는 말 그래도 ‘일이 있는’이란 말이야. 사람은 어떤 일이든 해야하니까, 일을 하면 행복하다는 거지. 넌 아직 어리니, 일을 하진 않지만, 네가 하는 모든 일이 기분이 좋으면 다 행복이지.”

“그런데 왜 넌 모양이 없는 거야?

“사람마다 좋아하고, 기분 좋은 일이 다 다르잖아. 그래서 나는 정해진 모양이 없어. 말 그대로 네 기분이야. 네 기분을 나타낸 그림이 나라고 보면 돼. 아마 네 마음속에 내 모습이 있을걸.”

“그럼, 고라니, 고라니는 어디 있지?”

“안녕, 난 고라니야.” 갑자기 사슴을 닮은 동물이 나타났습니다.

“반가워. 그런데 넌 사슴 아니야?”

“닮긴 닮았지? 그래도 사슴과 난 조금 다르지. 다음에 진짜로 만날 날이 있을 거야.”

“그런데 넌 왜 모습이 있지? 행복은 모습이 없는데.”

“음, 설명하기 조금 어렵지만 들어봐. 세상에는 진짜로 존재하고,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느낄 수 있는 물체가 있고, 존재하지만 모양이나 형체가 정해지지 않은 것도 있고, 느낄 수는 있지만 볼 수 없는 것도 있지. 그리고 뭔가 생각이나 마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게 있잖아. 행복은 마음이나 생각으로만 알 수 있는 거야. 그래서 모습이 없어. 난 진짜로 존재하는데 사람들이 나에게 고라니라는 이름을 지어준거지.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날 elk(엘크)나 moose(무스)라고 해. 똑 같이 있는 나인데 말도 다르고, 글자도 다르지.”

“신기하네. 왜 그렇지?”

“음, 아마 사람들이 자연에 맞춰 살면서 서로가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서 그렇지 않을까? 그건 네가 앞으로 천천히 알아봐.”

“내가 어떻게 알아봐?”

“나도 이젠 그만 가야겠다.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 넌 아마 좋은 언어학자가 될 거 같은데.”

“언어학자? 그건 뭐지? 그런데 벌써 가는 거야?”

“미안, 다음에 또 불러줘. 나도 또 만나면 좋겠네. 친구. 안녕.”

월요일 아침, 여느 때처럼 집안은 시끌벅적합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아이들. 일찍 출근한 엄마 대신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쁜 아버지.

“어서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학교 가자.”

세수를 하던 정훈이가 갑자기 세수를 멈춥니다.

“형, 행복이 뭔지 알아?”

“무슨 소리야?”

“행복은 일이 있다는 말이야. 우리가 학교에 가고, 아버지는 우리 밥 챙겨주시고. 그런 일말이야. 그래서 우린 행복한 거야.”

뜬금없는 정훈이의 말에 훈서는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오늘부터 나는 말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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