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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글손 Aug 24. 2017

만화

추억을 먹는 만화

오늘도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지하 만화방 문 앞만 기웃거린다. 주머니에는 구겨진 삼천 원이 구깃구깃 처박혀 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예전 같으면 컵라면 오백 원, 만화 서너 권은 거뜬히 보고도 집에 갈 버스비 정도는 남길 수 있었을 건데. 젠장, 짜증 나는 노릇이다. 


고등학교 시절 만화에 빠져 살았다. 한 권에 오십 원 하는 만화책을 하루에 만 원 어치도 보곤 했다. 만화 속 세상에 빠져 사는 것이 좋았다. 그저 행복했다. 지식의 8할은 만화책에서 얻은 듯했다. 그저 그 시절의 행복이 떠올라 도저히 문을 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만화방 유리문을 힘 없이 당겼다. 

끼이이익

강철의 마찰음이 고요한 저녁을 깨웠다. 서른 평 남짓한 만화방은 한산했다. 몇몇은 만화에 빠져 머리를 처박고 있다. 한 사람은 라면을 후루룩 거리며 만화책과 라면에 눈을 돌리며 정신없다. 한 사람은 지긋이 눈을 감고 있다. 딱 봐도 잠을 자는 것이다. 절대 잠을 자지 않는 듯 잠시 생각에 빠진 척하는 듯 하지만 확실히 그는 잠에 들었다. 한 사람은 아예 자리를 펴고 누었다. 곤히 자는 모습이 마치 만화의 주인공 같다. 허름하고 오래된 가게의 늙은 주인장처럼. 만화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들어오든, 무슨 소리가 나든. 주인장도 아무런 반응 없다. 그저 고요한 적막에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온다. 컵라면 향기가 코 끝을 적신다. 젠장, 이럴 때 하필이면 배가 고프다니.


주인장 앞에 있는 신간 진열대로 갔다. 반짝이는 코팅 표지에 무협지와 코믹스가 잘 정리되어 있다. 신간은 한 권에 육백 원, 조금 두꺼운 책은 팔백 원이란다. 신간 코너는 가볍게 제칠 수 있어야 한다. 신간은 아직 완결판이 안 나왔으니 볼 가치가 없다. 역시 만화는 완결이 중요하다. 위로의 코웃음이 나온다.

벽장에 고이 잠자고 있는 손때 묻은 만화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역시 만화는 고르는 듯하면서 기본 세 권은 보고 시작한다. 선 자리에서 만화책 열 권은 후딱 넘길 수 있는 눈과 그림을 간파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주인장의 눈치를 보는 감성도 중요하다. 눈치껏 몇 권을 뽑아 들었다. 돈을 계산하고 자리에 앉았다. 코믹스 몇 권에 삼천 원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시고 나니, 주머니엔 동전 두어 개만 달랑거릴 뿐이다. 한쪽 구석 자리에 앉았다. 만화는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봐야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테이블 건너 오래된 소파에 다리를 뻗어 올렸다.  거의 눕다시피 했지만, 이 역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편안히 책을 펼쳐 들었다. 

젠장. 본 것이라니.

다시 일어나려다 잠시 망설인다. 봤던 것이라고 새로 고른다면 쪽팔린다. 다른 것을 바꿔 볼 거라고 하면 되겠지만 그 역시 쪽팔린다. 그냥 재탕하기로 마음먹었다. 온 정성을 쏟아 천천히 천천히 읽는다. 글자 하나하나 그 의미를 놓칠세라 자음과 모음의 모양을 그리며 읽어나간다. 대사 하나 곱씹어며 의미를 되새겼다. 세밀화 그리듯 그림을 따라 나간다. 야밤이 되길 기다렸다. 수도 없이 다니는 차들 사이로 외로이 걸어가기 싫었다. 시간은 그렇게 천천히 흘러갔다.


이른 새벽길은 홀로 걷는 것은 덜 외로울 듯했다. 간간히 다니는 차, 그 주인도 필시 외로울 거니 말이다. 드디어 새벽이 왔다. 주인장은 몇 번 내 곁을 왔다 갔다 하더니 금세 코를 골았다.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거리를 걸었다. 집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얼마 멀지 않은 곳이지만 지랄 맞기는 마찬가지다. 

"만화 도서관이 생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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