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기억을 더듬지만, 기억은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그거 아련함만 남아서

by 말글손

J 이야기

내가 J를 만난 지도 벌써 44년이 흘렀다. 그의 어머니는 J를 낳자마자 들로 일을 나가야 했다. J는 주린 배를 부여잡고 울며 벽에 똥칠을 하며 방을 지켰다. 아마 J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J는 그렇게 엄마 젖 한번 먹고 나면, 혼자 방을 돌아다녔다. 자신이 싼 똥을 장난감 삼아 만지작거렸다. 그 손으로 벽에 그림을 그리며 유아시절을 혼자 보냈다.

그때처럼 지금도 혼자다. 혼자서 덩그런 빈 공간을 지키고 있으면 낮잠 몰려오기 십상이다. 잠시 눈을 감고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듯하다. 새로운 희망을 그리며 J는 잠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잠에 들기 전 머릿속을 맴돌던 희망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꿈속에서 J는 옛 강물을 따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첫 키스의 기억이 아련하다. 언제 했는지, 누구와 했는지, 어디서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거나, 의미 없는 키스였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머리가 이상하게 됐나 하는 불안이 스친다. 처음이라는 말을 잊은 지 오래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먹어본 말린 바나나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 알싸한 향기만 남아있는 것처럼.

담배를 처음 입에 물었던 그 순간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정지 문을 배꼼이 열었다. 정지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형과 처음으로 아버지 담배 한 개비를 훔쳤다. 연기가 목구멍을 넘자 목을 막는 기침이 쏟아졌다. 그러나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화투장을 잡았다. 아마 담배를 처음 물었던 시기와 닮아있었다. 민화투를 치면서 형과 점수 내기를 했던 기억이 가물거렸다. 딱밤을 하도 맞아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화투 패를 깔고 뒤집는 그 묘미는 알 수 없는 미지의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 삶처럼 재미있었다. 마치 지금 그리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함과 기대감처럼 말이다.

시골 생활이야 뻔했다. 일어나면 들에 나가 일하고, 어른들이 시키는 일을 해야 했다. 아이의 노동력도 농사에 쏟아부어야 했다. 온 가족은 논과 밭을 보면서 평생을 살았다.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라도 되는 냥 죽도록 일만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에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J 역시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냥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그저 좋았다.

J가 열두 살 때는 그의 아버지도 삶이 너무도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자식들 키우는 일이 힘들었는지 희망 없이 농사일에 파묻히는 게 싫었는지 그냥 그렇게 돌아가셨다. 암이라는 병마와 싸우다 돌아가셨다고 애써 위로하는 J는 늘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아버지의 사진 한 장 없지만, 그는 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J의 아버지가 죽은 후, 가족들의 삶도 많이도 변했다. 딱히 무엇이 변했는지 알 수 없지만, 참 많이 변했다는 것을 J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어머님의 삶도, 형제들의 삶도.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을 온 J는 제법 인정받는 학생이었다. 공부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방 메고 학교를 오간 것이 전부였지만, J는 성적이 좋았다. J는 늘 놀았다. 주말이면 자전거로 도시를 돌아다니거나, 만화방에 처박혀 만화 보는 일이 전부였다. 돈이 떨어지면 방에 누워 텔레비전으로 시간을 보냈다. 정 할 일이 없으면 책을 뒤적거리다 잠에 들곤 했다. 그래도 성적이 좋았다. 문제는 촌놈이 도시 생활에 적응을 하면서부터였다. 도시는 촌놈인 J에게 온갖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했다. J의 도시 생활 적응은 빨랐다. 그는 서서히 샛길을 걸었다. 금방이었다. 그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를 J는 생생히 기억한다. IMF라는 엿 같은 세상이 펼쳐졌다. 셋째 형의 사업 부도로 J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제대 후 형 사업장에서 일하면서 물려받을 생각이나 하고 있었으니. 부리던 J에게 제대란 엿 같은 세상보다 더 난감한 시련이었을지도 모른다. 오갈 곳이 없었다. 고향 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면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 것이라고 J는 후회를 했다. 그래도 도시 물 먹은 놈이 촌에 처박혀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 그의 큰형은 그를 도시로 내몰았다. 강원도에서 뺑이 치고, 한 이틀 서울에서 별 재미도 없이 놀고 제대랍시고 집으로 오니 형이 J를 불렀다.

“공무원 시험을 쳐라.”

형은 J에게 학원비를 내밀었다. 노는 데 몸이 적응이 된 J에게 공부가 손에 잡힐 턱이 없었지만, J는 아무 말 없이 학원비와 한 달간의 버스비를 챙겨 집을 나왔다. M시의 K공무원 학원에 등록을 했다. 잠자리는 셋째 형 집에서 빌붙기로 했다.

‘제기랄. 학원비가 왜 이리 비싸?’

이 돈이면 장사를 시작하겠건만. 형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한 강의실 제일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오전에만 강의를 듣고, 오후 내내 자습을 했다. 강의를 들을 때도 재미가 없었지만, 자습은 더더욱 재미가 없었다. 모르는 게 없는데 주야장천 외워 머리에 담아 놔야 했으니 정말 짜증 나는 일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이면 바보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놀림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요즘도 공시생들이 넘쳐나는 세상인데 이런 말 한다고 욕을 엉간히 들어먹을 각오를 해야겠다. 시대가 변한 건 사실이다. 하긴 나도 요즘은 5천 원의 자기 능력 테스트 삼아 공무원 시험을 치러 다니고 있으니 우습긴 하다. 오전 강의 후 다들 아는 사람들인지 친한 친구 사이인지 삼삼오오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나는 점심값이 아까워, 또는 혼자라는 사실이 쪽팔려 오락실로 향했다. 오락을 한 두 판 하고 나면, 캔커피를 하나 사 들고 자습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후 내내 캔커피 두 개로 시간을 죽이며 그렇게 해가 지길 기다리기만 했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날이 제법 흘렀다. 어느 날이었다.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앞모습을 본 적도 없는 여자인데 자리에 한 번 앉으면 일어나는 법이 없는 여자였다. 저렇게 앉아 있으면 궁둥이가 엄청시 키 커질 건데. 혼자서 별 걱정을 하면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한 여자였다. 그렇게 앉아서 책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 그 자체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늘 자리에 앉아 있으니, 얼굴을 제대로 볼 턱이 없었다.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에도 늘 내가 먼저 나가고 제일 늦게 들어오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갑자기 학원을 다닐 마음이 생겼다. 점심시간에도 저녁시간에도 자리에서 늦게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어 졌다. 며칠을 고생한 후에야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다. 예쁘다기보다는 그냥 그랬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녀의 모습에 온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책상에 앉아있는 그 모습 자체로도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런다고 내가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잘할 수 있으며, 늘 자신에 넘쳐 있었다. 단지 형에게 말을 못 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도전할 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자신이 있는 것과 용기 있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스스로의 삶을 준비하지 못하면 타인의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몰랐다. 안타까운 일이다. 점심 저녁을 굶고 나면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자습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야 끝이 났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저녁 시간이었다. 저녁 시간이 끝나고, 다시 자습 시간이 다가올 때였다. 그날따라 모든 게 귀찮았던 나는 멍하니 저녁 시간을 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멍청하게 저녁 먹으러 간 그녀의 자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내 책상에 무언가가 놓였다. 캔 커피였다. 하얀 손이 책상을 스쳐 지나갔고, 그림자만 흐릿하게 남았다. 시선은 캔 커피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녀가 가방을 들고일어났다. 내 곁을 스치고 지나는 그녀를 보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헐렁한 가방을 둘러메고, 버스 정류장에서 섰다. 같은 방향이었다. 그녀가 몇 번 버스를 탈지 알 턱이 없었다.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버스가 왔다. 나도 모르게 자존심을 세웠다. 난 모른 척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도 내가 탄 버스에 올랐다. 순간 가슴은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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