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
초등학교 2학년 땐 구구단을 제법 잘 외웠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나머지 공부를 하고 가야 하는 친구들을 데리고 보충 공부도 시키곤 했다. 그렇게 선생님께 인정받는 학생이었지만, 금상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1980년대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95점 이상은 금상, 90점 이상은 은상, 85점 이상은 동상을 주었다. 나는 늘 은상에 머물렀다. 어릴 적부터 형들은 나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아마 자기들이 심심해서 그랬을 것이라 추측된다. 놀러 가고 싶은 예닐곱 살 꼬마를 억지로 잡아두고 공부시켰다. 나는 틈만 나면 변소에 간다고 도망을 쳤다. 하지만 아무런 뒤탈은 없었다. 알파벳도 배우고, 구구단도 배웠다. 형들의 책장에서 제법 멋진 책도 읽었다. 공부하는 형의 어깨너머로 신세계를 경험하곤 했다.
학교에선 제법 장난꾸러기로 통했지만 공부도 웬만큼은 인정받았다. 친구들의 구구단 암기를 도와줄 정도는 되었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금상을 받으면 당시 최고의 고가 학용품인 ‘샤프’ 연필깎이를 사 주신다고 했다. 아마 내가 공부를 좀 더 잘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늘 은상에 머물러 그렇게 갖고 싶던 자동 연필깎이를 선물로 받지 못했다. 하지만 나보다 3살 많은 막내 형은 언제나 모든 과목에서 금상을 받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초등학교 전체 시험에서 단 한 번도 금상을 놓친 적이 없었다. 아마 학교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막내 형의 그늘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세월이 흘러서야 들었다.
형이 6학년이 되면서, 수학여행을 떠났다. 언제나 전 과목 금상을 휩쓸고 교내외 상이란 상은 다 휩쓸던 형이 수학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놀러 가서 어떻게 수학을 배운단 말이지? 왜 수학을 배우기 위해 여행을 떠날까?’
형의 여행 가방이라고 해야 단출했다. 늘 메고 가는 가방에 편찮으신 아버지가 쥐여 준 3천 원. 초등학교 수학여행이라고 해야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시절이었으니 별도의 준비물도 필요 없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형은 3천 원을 그대로 아버지께 돌려드렸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3년이 흘러, 나도 부산 금강 식물원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불현듯 3년 전의 의문이 다시 들었다.
‘도대체 왜 수학을 배우려고 여행을 가고, 식물원에 가서 무슨 수학을 배운단 말이지?’
그 사이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를 대신에 어머님이 줌치를 여셨다. 어머님은 꼬깃꼬깃한 돈 3천 원을 손에 꼭 쥐여 주셨다. 나는 돈 3천 원을 주머니에 고이 집어넣었다. 행여나 잃어버릴 새라. 낯선 도시로의 첫 여행이었다. 버스에 올라 부산으로 향했다. 식물원에 도착하여 몇 곳을 돌아보고, 점심을 먹었다. 식당에서 먹는 첫 외식이었다. 과자와 음료수도 사 먹으니 3천 원은 너무 작은 돈이란 걸 알았다. 우리 집이 좀 더 부자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문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수학을 배우지도 않는데 왜 수학여행이라고 부르지?’
잡아두지 못하는 시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쉽다. 지금의 생각을 가진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면 삶이 조금 더 나아졌을까? 수학여행이 최소한은 무엇인지 알고 떠나지 않았을까? 내가 그렇게 수학여행을 떠나던 그날이 큰 아들에게도 찾아왔다. 요즘 초등학생의 수학여행도 2박 3일은 된다. 아들과 수학여행 코스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학여행에 가서 보고 배운 내용을 적기 위해 기록장도 챙겼다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아내는 아들이 입을 옷가지와 세면도구도 챙겼다. 입고 갈 옷이 별로 없다며 얼마 전부터 인터넷 쇼핑을 하며 부산했다. 여행 전날, 큰 아들의 수학여행 간식을 사러 마트에 갔다. 할 일을 잠시 미루고, 마트에 갔다. 과자도 사고 음료수도 살 요량이었다. 마트를 배회하다 뭘 사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어떤 과자와 음료수를 사야 할지 몰랐다. 집으로 전화해, 아들을 마트로 불렀다.
“내일 버스에서 친구들하고 먹을 과자하고 음료수 골라봐.”
사내 녀석이 몇 가지만 들고 온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자는 아니지만, 아들 수학여행 과자 값을 아낄 만큼은 아닌데 누굴 닮아 구두쇠처럼 구는지.
마트에서 아들의 친구들을 만났다.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의 간식을 사는 모습을 보니 참 대견스러웠다. 내 자식은 늘 부족해 보이고, 남의 자식은 커 보인다는 말이 맞나 보다. 요즘 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확실히 내가 살던 세상과는 달랐다. 뭐든지 필요하면 살 수 있는 세상, 무엇이 필요한 지 스스로 알 수 있는 세상. 하지만 나는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세상을 살았고, 우리 동네 구판장이나 학교 앞 점빵에 파는 상품이 전부 인 줄만 알고 살았다. 그리고 갖고 싶어도, 먹고 싶어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세상에 살다가 신세계를 접하면서 나도 꽤나 부유한 척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진 것도 없고, 제대로 아는 것도 없지만, 남들이 하는 대로 흉내를 내면서 그렇게 온갖 폼을 잡고 사는 것이 멋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들의 손을 잡고 시장을 가로질렀다. 전통시장이라고 하지만, 깔끔하게 단장된 시장이다. 지역의 특색을 잃은 지 오래다. 꼭 같은 간판에, 가게의 특성이라곤 파는 물건만 다를 뿐 시장은 마트와 꼭 닮은 모습이다. 노점을 하시는 할머니들께 인사를 하면서 집으로 오는 길이 자꾸만 멀어졌다. 아버지와 처음 고성 우시장에 나갔을 때가 생각났다. 아마 일곱 살쯤 되었으리라. 이른 새벽, 형의 등록금 마련을 위해 함께 하던 눈이 큰 소를 내다 팔러 가는 길이었다. 새끼와 헤어지는 어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한 장의 사진이다. 우시장에서 아버지와 국밥을 한 그릇 먹고 집에 온 기억이 나의 첫 시장 나들이였다. 큰 형과 어머님과 함께 유자 경매시장에 나간 기억도 떠올랐다. 한 겨울, 손을 호호 불며 먹던 시장 국수 한 그릇이 국수 그릇에 피던 김처럼 피었다. 시장은 제 나름의 멋을 가진 곳이다. 그런데 요즘 시장은 제 나름의 멋을 잃어버렸다. 마치 일률적으로 자식의 성공만을 바라는 현대의 부모들처럼.
수학여행을 가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힘든 농사일에도 악착같이 아끼고 모아 여섯 남매 공부시키고 논밭을 넓혀가던 아버지의 얼굴이 녀석의 얼굴에 겹쳤다.
“기분이 어때?”
“그냥 그래요. 친구들하고 놀아서 좋기도 하고 엄마 아빠랑 헤어져서 서운하기도 하고.”
“엄마는 큰 아들 수학여행 간다고 신경 많이 쓰시던데.”
“잘 다녀올게요. 걱정 마세요.”
여섯 남매의 늦둥이로 태어나 친구 같은 아버지는 고사하고 친구 같은 형도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내 기억의 아버지는 독 창문을 열고 담배를 태우며 새마을운동 노래를 라디오로 들었다. 이른 새벽에 들에 나가시고 저녁 먹을 때나 들어오셨다. 그러다 암에 걸려 잠시 병원을 오가시다 막내의 첫 수학여행도 보지 못하고 떠나셨다. 그렇게 내 옅은 기억의 아버지 모습이 아들 얼굴에 피었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나처럼 했을까? 시골 형편상 어려웠겠지.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 내게 돈 3천 원을 쥐어주신 어머님도 지금의 나와는 달랐으니. 그때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으니. 내 아버지가 지금 시절에 사셨다면 어땠을까? 내 어머니가 지금 이 시절의 젊은 엄마라면 어땠을까? 지금의 나처럼 아이들과 마트에 들러 수학여행에 챙겨갈 간식을 사고,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어린 자식의 낯선 여행을 응원해주었을까? 마음이야 지금의 내 마음보다 더 애틋하고 애절하셨겠지만, 말과 행동은 이렇게 은근히 자랑하는 내 발밑에도 못 미치니 참 못난 부모님이다. 나는 아직도 부모님 마음의 백분의 일도 모르는 못난 자식이지만. 세월이 좀 더 흐르고 나면 나도 역시 내 아들에겐 못난 부모가 되겠지. 녀석도 세월이 흘러 이제야 내가 못난 자식임을 깨달을 즈음.
“그런데 훈서야, 넌 수학여행이 뭔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