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단 둘이 누워

엄마의 이야기는 끝이 없으나, 그 기억이 이제는 사라져간다.

by 말글손

엄마랑 단 둘이 누워


엄마와 둘만이 나란히 누웠다. 둘만 한 방에 누운 지, 꼭 이십 년이 되었다. 아니 그 동안에도 몇 번 누운 적이 있지만, 맨 정신으로 누운 적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후에도, 고향에 오면 친구들을 만난다고 늦었다. 나는 입 속에서 고약한 소주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엄마는 곤히 꿈에 빠져 계셨다. 그럴 수밖에. 하루도 쉬지 않고 고된 농사일을 새벽부터 밤까지 혼자서 다 해내시니, 꿈이 아니라 그냥 숨만 쉬고 계시는 지도 몰랐다. 엄마의 나이는 팔십하고 하나다. 내 나이는 마흔하고 하나다. 엄마는 나를 꼭 마흔에 낳았다. 나는 엄마의 꽃다웠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엄마는 여섯 자식을 키우느라 늘 지친 모습이었다. 아니, 사진 속에서 엄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낡고 흐린 흑백 사진 속의 엄마는 갓 돌 지난 나를 안고 계셨다. 내 기억 속의 엄마의 예쁜 모습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 엄마 곁에서 막내는 애교 한 번 떨지 못했다. 웃음을 전해드리지도 못했다. 늘 자식은 엄마에게 애정을 받기만 했다.

2016년 설날 풍경 (6).JPG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이십년 전 엄마의 환갑날이었다. 처음으로 모든 자식들이 모여 유성온천에 놀러갔다. 엄마의 노래를 들은 것도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여행을 갔을 때도 엄마는 자식들만 챙기셨다. 큰 형님이 시킨 장어구이 1인분. 엄마는 딱 한 점만 드시고, 접시를 자식들에게 내밀었다. 엄마는 그랬다. 어린 시절 전어 한 마리를 구워도 엄마는 대가리만 씹어 드셨다. 대가리가 고소하다고 하셨다. 살점 하나 없는 전어 대가리는 쓰기만 했다. 그러나 엄마는 그랬다. 집에 돌아와 모든 형제가 떠나고 엄마와 단 둘이 누웠다. 입대를 며칠 남겨두고 막내와 엄마가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오늘 꼭 이십년 만에 다시 맑은 정신으로 누웠다. 한 번도 어머니께 물어본 적이 없는 지난 이야기를 묻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자식 키우기에 바빠 한 번도 당신의 삶을 자식들에게 말해 줄 틈도 없이 살아오신 어머니께.

2016년 설날 풍경 (33).JPG
2016년 설날 풍경 (398).JPG

“오늘이 6·25네요. 엄마, 6·25 때 북한군이 여기는 안 왔습니까?”

“와 안와. 내가 시집오기 전인데. 한 열 일곱 살 쯤 됐는갑다. 저 멀리서 비행기가 날아오면 전부다 집에 숨으라꼬 난리였제. 하루는 밭에서 일하다가 비행기가 왔다 아이가. 전부다 고랑에 엎드리라고 난리나고 그랬제.”

“그러면 농사도 지을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았습니까?”

“무신 소리하노? 먹고 살라 하께나 이것 저젓 되는대로 심었제. 그래도 뭐 되는 기 하나도 없었다.”

“뭐 먹을 것도 별로 없었을 건데 어떻게 지냈습니까?”

“산에 가서 나무 껍데기도 깍아서 죽 끓이 묵고 했지. 그래, 먹을 끼 없으께나 어른들이 삼일을 걸어서 저기 개천면에 가가 쑥을 캐 왔다아이가. 그 쪽에는 풀이 좀 있었는 갑더라꼬. 그 쑥 가꼬 밀가리 좀 풀어서, 죽도 끓이 묵었지. 왜정 때 보다 더 힘들었다 아이가. 그때는 다 안 그랬겄나?”

“저게 큰집 대나무 밭 밑에 동굴이 있다던데 진짭니까? 어릴 때 형님들이 그러던데, 그 동굴에 사람들이 피난했는데 국군이 동굴 안으로 총질을 하고 했다던데요.”

“그거는 내 잘 모리것다. 그런 얘기도 들은 거 같거마는. 하기는 이 동네하고 저기 동해면에서 하고 전쟁도 했다쿠더라. 우리 동네에도 괴뢰군이 왔는데, 겁이 나가꼬 집 밖으로 나가도 안했다. 전부다 숨어서 살았제.  안 죽을라꼬 뭔지도 모리고 살았고, 전쟁 끝나고 나서는 묵고 산다고 바빴고. 인자는 기억도 잘 안 나네.”

“엄마는 일제 강점기 때 몇 살이었어요?”

“왜정 때 말이가? 기억도 잘 안 나네. 내가 한 열 살이나 됐을끼다. 얼추 내가 열 두 세살 때 해방이 됐으께나.”

“그때도 힘들었죠?”

“내는 잘 모르것다. 그때는 어리고, 기억도 잘 안 나네. 왜놈들이 와 가꼬 집에 있는 숟가락, 밥그릇, 이런 거 다 뺏어 가는 게 생각나고. 그래도 전쟁 때 보다는 나았던 거 같은데……. 잘 모리겄다.”

“엄마, 옛날에 내 여섯 살 때쯤인가? 비 오는 날에 턱 깼을 때요.”

“ 아! 니가 너거 아부지 딸딸이(슬리퍼) 끌고 정기(부엌)에 오다가 턱 깬 날 말하나?

“그때 엄마는 절 업고 어떻게 그렇게 논두렁을 잘 달렸어요?”

“정신이 없었제. 너거 아부지 논에 가서 아직 안 왔을 때 아이가. 비도 오고, 너거 아부지 오면 배 고풀까 봐서 석유 곤로에 찌짐 하나 꾸버 먹을라 했더마는. 니가 턱을 깨가꼬. 우짜끼고. 피가 철철 나는데.”

비가 올 때면, 엄마는 밭에서 풀을 뜯어다 찌짐을 부쳐 주셨다. 가끔은 고구마 빼떼기 죽도 끊여 주셨다. 비가 오면, 나는 행복했다. 딱히 먹을 것이 없는 농촌 생활이 그러했듯이. 그날도 엄마의 ‘찌짐’ 소리에 나는 성급했다.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흙 묻은 슬리퍼를 끌고 부엌으로 갔다. 부엌의 턱을 넘으려다 넘어졌다. 부뚜막에 턱을 찧었다. 옛날 사진에서나 보든 그런 부뚜막에서. 턱에서 사정없이 피가 흘렀다. 엄마는 비 쏟아지는 논두렁 위를 달렸다. 질퍽한 논두렁을 한번 미끄러지지도 않고, 약방이 있는 마을까지 십 여분을 그대로 달렸다. 약방문을 다급히 두드렸다. 엄마의 등은 빗물과 핏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약방 어른은 낚시 바늘과 낚시 줄로 내 턱을 세 바늘 꿰맸다. 아직도 턱에 남아있는 희미한 흔적을 만질 때마다 엄마의 등이 느껴진다.

IMG1489.jpg

“엄마, 전에 내 휴가 나왔을 때, 아버지 산소 옆에서 그 말했잖아요. 아버지가 고기 한 점 먹고 죽었으면, 억울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랬제. 그때 니하고 둘이서 콩 타작 할 때, 그랬는 갑다. 너거 아부지는 진짜로 돈 내고 고기 한 점 안 묵어봤다. 동네잔치나 있을 때 한 점 묵었지.”

“좀 사드시지, 왜?”

“처음 시집와가꼬 너거 큰집에 같이 살았다 아이가. 그라다가 너거 큰 행님 낳고, 조깨난 집 지어가꼬 나왔는데. 땅이 있나? 머가 있노? 너거 아부지하고 쌔가 빠지라 일해가꼬 땅 좀 사고, 농사 좀 늘리고. 그라께나 우린 논, 밭이 전부다 집에서 멀다 아이가. 좀 싸고 넓은 땅 사끼다꼬 동네서 먼데 먼데만 산기지. 너거들 키울라면 오데 십 원 하나 허투루 쓰겄나?”

엄마는 언제나 필요한 말만했다. 세세한 이야기를 할 틈이 없었다. 언제나 바빴고, 이야기 할 힘이 있으면 논밭에 풀 한 줌 더 뽑아 내셨다. 그래서 말투가 언제나 툭 쏜다. 목소리도 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 안 듣고 애먹이는 다섯 아들과 딸을 키우느라 자연스레 목소리가 커졌으리라. 비 오는 날, 천수답에 물을 대려면, 괭이를 들고 동네 남정네들과 싸워야 했다. 목소리가 작으면 해 낼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어쩌면 여자다운 엄마를 남자답게 만들어 버린 범인은 바로 자식들이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다. 점심 도시락을 먹고, 오후 수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교실 문이 열리고, 주사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장진석이. 너거 아부지 오데 아푸시나?”

“예.”

“퍼뜩 집에 가 봐라.”

고성 고매 (63).JPG

그냥 집으로 내달렸다. 논두렁, 밭두렁을 어떻게 넘어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집에 오자 엄마는 비녀를 빼고, 긴 머리를 풀고 계셨다. 엄마가 날 불렀다. 그냥 엄마 품에 안겨 한없이, 한없이 울었다. 염을 했다. 볼록 나온 아버지 배가 눈에 들어왔다. 누렇게 변한 얼굴.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와 작별 인사를 하셨다. 상을 치르는 동안, 나는 여전히 철부지였다. 상복을 입고 동네 형들과 친구들과 물총 싸움도 했다. 너무 더워 상복을 벗고 싶었다.

“엄마, 나 이 옷 벗으면 안돼?”

“벗어라. 많이 덥제? 벗고 나중에 입어라.”

그때, 큰 형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형님 덕분에 나는 아버지 곁을 지킬 수가 있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며 말이다. 상여가 장지를 향해 갈 때, 나는 상여를 막아섰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랬다. 육촌 형수가 나를 막았다.

“도련님, 관 묻기 전에, 아버지 얼굴 한번 보여 줘요. 아버지 가시게 비켜 줘요.”

사실이 아니란 것을 입관할 때 알았다. 아버지는 땅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셨다.

아버지는 간암으로 병원에서 계시다, 집으로 오신지, 두어 달이 되었다. 아버지가 병석에 계시는 동안, 손님들이 먹을 것을 들고 집으로 오셨다. 드시기 좋은 황도며, 백도를 사 오셨다. 언제나 나는 그 통조림에 눈이 갔다. 아버지는 황도를 남기셨다. 나는 아버지가 남긴 통조림 복숭아를 맛있게 먹었다. 아버지는 그 와중에서도 나를 챙기셨다. 몰랐다. 아버지가 먹기 싫은 줄 알았다. 소꼴을 하러 가셨다 오시는 아버지의 지게에는 숨겨둔 줄딸기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무도 몰래 막내에게만 줄딸기를 주셨다. 겨울방학이 되면 우리는 나무를 하거나, 새끼줄 꼬아야 했다. 나무 한 짐에 얼마, 새끼줄 한 통에 얼마. 이런 식으로 세뱃돈을 받았다. 아버지는 노동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동네 굳은 일은 도맡아 하시던 아버지. 이웃에게 언제나 칭찬받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의 기억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가 지워졌다.

“엄마, 큰 형님 죽고 나서 우리 집 많이 변했죠?”

“흐음.”

P4270370.JPG

엄마는 외마디 신음으로 말을 접으셨다. 돌아누워 눈물을 훔치시는 게 틀림없었다.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흙벽에 붙어 있는 벽지가 너덜너덜했다. 입대하기 전에 엄마랑 둘이 누워서 한창 미래를 꿈꾸었다. 학창시절 잠시 허투루 시간을 보냈지만, 꿈은 컸다. 셋째 형님의 장사를 물려받아 열심히 일하면, 홀로 여섯 남매를 챙기신 어머님을 더 잘 모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건강히 제대하고, 학업을 마치면 형님의 일을 물려받을 준비가 되는 것이었다.

“엄마, 내 제대하고 나면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살아요. 내가 엄마 일도 다 해주고. 인 자 고생도 좀 그만하고.”

“언냐. 건강하게 제대해 가꼬 잘 해라.”

하지만 내가 군에 가 있는 동안에 모든 상황이 변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나 스스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간이 계속 되었다. 그 와중에 어느 정도 집안이 정리될 즈음에, 큰 형님은 교통사고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형님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어린 자식 둘을 남기고, 철없는 동생들만 남긴 채, 집안의 대들보인 형님이 돌아가셨다. 엄마는 그렇게 큰 세상 하나를 먼저 가슴에 품었다.

P7120206.JPG

엄마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신다. 다른 형제들은 엄마의 세상을 잘 모른다. 가끔 먼 산을 보며, 눈물을 짓는 모습, 막내만 바라 본 엄마의 마음. 어쩌면 엄마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나만의 특권이었다. 잡을 수 없는 세월은 잘도 지나갔다. 자식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의 또 다른 가정을 꾸리며 열심히 생활했다. 어엿한 사회인으로 다 성장한 다섯 아들과 한 명의 딸. 손자 여섯, 손녀 다섯을 둔 팔순의 엄마. 엄마에게도 소소한 행복이 열매를 맺었다. 엄마 얼굴에 활짝 웃음꽃도 피었다. 엄마가 나를 낳은 지 사십년이 지나도, 두 아들을 키우는 애비가 되어서도 몰랐던 엄마. 아직은 다 알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을 보았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엄마의 이야기 하나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불효자가 엄마 곁에 누워서야, 엄마의 인생이 생각났다. 졸린다. 눈이 감긴다. 엄마를 돌아본다. 엄마는 그렇게 잠 속으로 빨려 들었다. 쌔근쌔근 숨소리가 엄마의 세월과 함께 묻어난다.

P7120217.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믿음은 어디서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