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과 도덕적 삶에 대한 소고

by 말글손

자연 과학으로

세상을 읽는다.

학술콘테스트 글쓰기 공모전

‘나’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과 도덕적 삶에 대한 소고



장진석

주최,주관:(주)마이다스아이티

‘나’라는 존재를 찾아서 떠나는 성찰의 여행이 쉽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끊임없이 답하며 자신을 찾으려는 여행을 떠난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것을 목표로,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부의 욕심으로 자신을 채우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사회적으로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자연 친화적인 삶을 누리길 원한다. 현재 대부분의 기술문명의 혜택을 받는 이들이 은퇴 후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함께 살아가길 바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일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미국의 성공한 사업가는 은퇴 후 삶의 여유를 누리며, 브라질의 작은 어촌을 찾는다. 자연과 더불어 여유있는 삶을 만끽하던 그는 그곳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를 만난다. 바다 속에는 풍부한 어자원이 있어 어부는 손쉽게 몇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 집으로 돌아간다. 며칠 동안 그 어부를 바라보던 사업가는 궁금해졌다.

‘왜 저 어부는 고기를 넉넉히 잡아 팔지 않는 것일까? 왜 어부는 고작 몇 마리의 물고기로 만족하고 돌아가는가?’ 사업가는 어부에게 다가가 이렇게 묻는다.

“이보시오. 젊은이. 내 며칠 당신을 지켜보았소. 바다 속에는 저렇게 많은 물고기가 있고, 저 물고기를 넉넉히 잡아 판매를 한다면 당신은 쉽게 부자가 될 것이라 생각이 드오. 그런데 왜 당신은 매번 몇 마리의 물고기를 잡는 데 그치시오? 당신은 아이도 있는 가장이 아니오.?” 어부는 사업가의 질문에 어리둥절해졌다.

“왜 내가 많은 물고기를 잡아 판매를 하고 돈을 벌어야 합니까?”

“당신이 고기를 많이 잡아 팔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아이들도 잘 키울 수가 있지요. 그리고 나중에 나처럼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하면 이렇게 여유있는 삶을 즐길 수 있지 않소.”

“이보슈! 양반. 나는 이미 당신이 즐기고 있는 여유를 가족과 즐기고 있소. 당신은 젊어서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삶의 여유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오. 가족은 더할 말도 없겠지요.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런 삶의 여유를 자연이 준 혜택과 함께 누리고 있단 말이오.”


인간이 바쁘게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진짜의 자신을 찾는다는 핑계와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으로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의 진화와 맞닿아 있다.

-생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지구는 원자번호 1번인 수소부터 94번인 우라늄에 이르는 92가지 종류의 자연원소(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생물들은 그 중 스무가지도 안되는 원자들로 만들어져 있다. 생물체의 거의 대부분은 탄소, 산소, 수소, 질소, 인, 황 등 몇 가지 아주 흔한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생물체가 가진 특별한 원자란 없다. 따라서 원자의 수준에서 보면 무생물과 생물은 같은 것입니다. (생물학 이야기 p 35)-

결국 인간이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몇몇 원자들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합성체에 불과하다. 자연히 인간이 자연에서 ‘나’라는 존재를 찾으려는 본능은 인간의 진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나는 진하게 잘 걸러진 탁주처럼 삶의 군더더기와 맛을 아는 사람. 한 때는 누룩이었으나, 그 이전에는 한 줌의 쌀에서, 애초에는 쌀을 구성하는 작은 분자에 불과했던 사람. ‘나’라는 사람은 본시 이 무한한 우주의 한 줌 알갱이에서 지금의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한 덩이의 고기이기 이전에 무한한 우주를 구성하는 한 알의 알갱이에서 시작된 나라면, 나 역시 무한한 힘을 가진 작은 우주를 형성하고 살고 있다. 우주의 시작이 하나의 먼지였고, 지구의 역사는 그 먼지가 모여 폭발하면서 시작되었다면, 나의 시작은 작은 알갱이였고, 그 알갱이가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잘 익은 탁주 한 잔을 마셔보았는가? 한 알 한 알의 구수한 내음이 코끝을 간질이고, 그 한 알이 혀끝을 스치면서 우리는 인생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알갱이 하나를 우리는 탁주라 부르지 않는다. 나라는 인간 역시 단 하나의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 잘 익어가는 탁주가 조금 더 익으면 새큼한 식초로 변하듯 나 역시 지금의 나를 어찌 무엇이라 규정할 수 있겠는가? 한 톨의 쌀이 효소를 만나 잘 발효되고, 잘 발효된 그 쌀이 누룩이 되고 그 누룩이 탁주로 변하고 그 탁주가 다시 식초로 변하고 다시 식초는 또 다른 무엇으로 변하여 증발하여 사라지듯, ‘나’라는 인간도 그렇게 끊임없이 변해가고 진화해가는 생명에 불과하다. 아주 긴 세월을 변화하고 진화해 온 우주의 역사를 나는 백년도 되지 않는 시간에 그 긴 우주의 역사를 내 한 몸에 다 드러내고 있으니 어쩌면 나는 우주보다 더 광활하고 깊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시작에 대한 성찰과 변화하는 자신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 만물 속에서, 무엇을 무엇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 진실일 것인데 우리는 굳이 그 무엇이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고 얄팍한 인간의 우세함을 내세워 우주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사람인가? 어찌 나를 사람이라 칭할 수 있는가? 인간의 정체성을 논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이 벌써 자신이 인간임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사람이라는 하나의 개체 사이에서 존재하는 또 다른 하나의 개체, 즉 원자나 분자에 불과할 뿐이다.


따뜻한 커피 한잔은 커피 분자와 물 분자가 서로 만나 얽히고설켜 커피가 된다. 커피 분자 하나를 맛보고 우리는 그것을 커피라 부르지 않는다. 탁주는 쌀이 발효되어 만들어 진 것이나 우리는 쌀 한 톨을 탁주라 부르지 않는다. 나라는 사람 역시 혼자 존재하는 고독을 즐긴다고 하여 인간이라 부를 수 없다. 인간이란 사람이라는 한 개체와 개체 사이에서 이리저리 튕기고 부딪히며 만들어 내는 자아를 인간이라 부를 것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 역시 혼자 있어 수많은 사고를 한다고 한 들, 결코 인간이라 부를 수는 없다. 내 살점을 하나 떼어 내면 그것은 생명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살점이 내게 붙어 있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생명이라 귀이 여긴다. 바위의 알갱이 하나, 한 방울의 물을 우리는 생명이라 부르지 않는다. 목욕탕에서 벗겨낸 한 줌의 때를 생명이라 부르지 않지만, 그 때조차도 나의 몸에 붙어 있는 순간은 세포라는 이름의 생명을 얻는다. 결국 인간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인간다움을 발휘할 수 있으며, ‘나’라는 존재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게 된다. 사람이 모여 살아가는 사회는 크게는 우주에서 시작하지만, 지구로 이어진다. 그리고 지구는 현재 국가, 사회, 가족, 나로 이어지는 생명의 집합소임에 틀림없다. 이제 ‘나’라는 존재가 모인 가족, 사회, 국가의 관계 속에서 ‘나’를 찾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로 ‘도덕적 삶’이란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갈 수 있다.

애초부터 세상 만물은 그 원자와 분자들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따라 그 성질이 변해왔다. 수소 두 알과 산소 한 알이 만나 물이 된다. 하지만 산소 한 알이 탄소 한 알을 만나면 일산화탄소가 된다. 산소가 수소를 선택할지, 탄소를 선택할 지의 문제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산소는 수소와 탄소와 협력을 하지만, 수소와 탄소는 경쟁의 관계를 맞이하게 된다. 이는 세상 모든 존재는 어떤 하나의 변하지 않는 것이라 단언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유전 정보를 가진 DNA 조차 다른 유전자와 만나 재결합하면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 몸 속에는 아버지의 DNA와 어머니의 DNA가 있지만,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는 다른 하나의 개체임에 틀림없다. 세상 모든 존재는 경쟁과 협력을 관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면서 새로이 진화하여 변화한다. 이렇게 생명-특히 인간-은 왜 경쟁과 협력을 생존의 기본 요소로 선택하게 되었는가? 생명의 본질인 자손을 남기는 일, 그를 위해서는 공동의 보금자리를 지켜낼 필요가 당연으로 따라왔다. 또한 다른 생명에 비해 양육기간이 길어졌다. 결국은 생명의 본질인 자손을 남기는 일을 위해 사회를 이루고 그 속에서 경쟁과 협력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서 모든 생명은 지금 현재의 선택의 문제에 따른다.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와의 협력할 것인가? 경쟁할 것인가? 에 대한 선택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이다. 결코 어떤 것이 바른 것이라고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달라지면 모든 선택은 변할 것이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존재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에 대한 합리적인 변론을 펼쳐나가야 생존할 수 있으며, 후대에 자신의 씨앗을 남기는 생명의 근본적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국가란 애초 나에서 시작하여 가족, 부족, 민족, 사회의 단계를 거쳐 보다 광범위한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생존의 새로운 도구로 탄생하였다. 인간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이 결국은 거대한 집단인 국가의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정치는 강제성을 띈 법으로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법 이전에는 자연법- 도덕, 종교-이 가족과 부족, 민족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탱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거대 집단인 국가의 모습에서는 자연법이 다양한 집단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협력과 융합을 이끌어 낼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정치를 하는 이들-기득권을 유지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욕망-은 끊임없는 법의 진화를 통해 국가를 다스려왔다. 그러나 국가 간에도 다양한 문제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을 침범하는 사례는 많다. 과거 국가 간의 전쟁은 국가 간의 문제였다. 타국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은 국가의 존폐를 결정하는 문제였기에 두 국가 간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근대와 현대로 접어들면서 세계는 좁아졌다.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1차 세계대전이나 2차 세계대전에는 다국간의 협력과 경쟁 구도를 갖추게 되었다. 전쟁에서 이긴 협력국가들은 전쟁에서 패한 국가들에게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한 이득은 패전국이 아닌 승전국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왜 국가는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에 참여하려고 하는가? 이는 결국 타국의 시선을 염두에 둔 국가 이익을 따르는 선택의 문제였다. 전쟁에 참여한 국가는 결코 국민의 이익이나 행복을 염두에 둔 국민의 시선을 의식한 문제는 아니었다. 바로 국제 사회의 시선, 그들의 향후 조치에 대한 불안으로 그들에게 협력을 한 것이다. 반대로 협력국가가 생긴다는 의미는 경쟁국가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는 협력과 경쟁의 기로에서 합리성에 따른 판단을 내린다고 스스로 위안을 한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문제에도 자연스레 소위 ‘도덕’이란 개념이 개입을 한다. 국제 사회의 비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비록 국가적 손실이 따른다 하더라도- 비도덕적인 일에는 경쟁을 해야 하며, 도덕적이라 판단되는 일은 국가적 손실이 오더라도 협력해야 한다. 국가의 선택은 전 지구적인 문제에 있어 현재의 시간과 지금 이 곳의 공간에 문제에 따라 선택을 하고 합리성이라는 허울 아래 자국의 선택에 대한 변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의 도덕이다.

민족 간의 옳고 그름의 문제에도 도덕적 선택은 이루어진다. 국가와는 달리 민족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민족만의 정서적 이익을 위한 선택이 다를 뿐이다. 민족이란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비슷한 유전자를 지닌 이들의 집단이다. 과거, 민족의 정서는 개인으로 시작하여 종교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권리보다 원칙과 구성원의 의무를 중시하는 종교는 강력한 집단내의 협력 체계를 만들어 준다. 결국 타 종교와는 경쟁관계에 돌입하며, 때론 어떤 경쟁관계보다 위협적이고 저돌적인 경쟁으로 바뀌기도 한다. 서로간의 다름의 문제를 포용하는 순간, 종교의 체계는 무너지고, 집단은 와해될 것이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이념을 실체로 만들어내며 진화하면서 변화하는 개체를 종교라는 허울로 묶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고대 사회를 벗어나 근현대로 넘어오면 같은 민족 내에서도 다양한 종교가 전해진다. 이로 인한 문제는 타민족이 아닌 한 민족 안에서도 다양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대부분의 국가가 민족을 근간으로 하여 설립된 것이라 보면, 국가 간의 전쟁, 즉 갈등과 경쟁이 왜 발생하며, 그에 대한 근거가 종교가 된다는 것을 살펴보면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현대에 접어들면서 그 복잡성은 더해졌다. 하나의 민족 내에서도 다양한 종교가 존재함으로써 민족 안의 집단 형성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이것은 결국 다양한 경쟁과 협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현대의 기독교, 불교, 이슬람 등 많은 종교들이 타 종교를 수용하는 분위기다. 물론 그들의 ‘신’의 존재에 대한 인정은 쉽지 않겠지만, 타 종교를 보다 포용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에는 더욱 복잡한 집단의 선택문제가 발생한다. 몇 되지 않은 분자들도 구성된 개인이라는 존재가 사회를 구성하고, 그 개인들은 다양한 사회적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한 데 어우러져 구성되는 사회는 다양한 계층과 개인들로 구성된 각각의 집단이 모여 형성된다. 이러한 사회적 집단에는 무엇이 옭고 그름을 판단하며, 도덕이라는 미명으로 집단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도, 사회는 변화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와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로 크게 나누어진다. 진보와 보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관계를 구성한다. 진보진영은 변화를 추구하기에 기존의 틀을 흔들어야 하며, 보수진영은 안정을 추구하기에 변화를 거부해야 한다. 물론 그 사이에는 중도라는 계층이 별도의 집단을 형성하여 냉소적 입장을 펼치며 보수와 진보를 평가하고 있다. 결국 사회적 집단은 서로 경쟁의 관계에서 진화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경제적 집단의 경우에도 경제적 안정 집단과 불안정 집단이 서로와 경쟁하면서 변화한다. 한 때는 안정적인 집단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불안정한 집단으로 바뀌기도 한다. 현대 경제적 집단의 문제는 바로 변화를 두려워하는 ‘현재 안정’이라는 기득권을 잡은 집단은 진화와 변화라는 자연의 원리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한번 잡은 권리를 절대 놓치지 않기 위하여 도덕을 넘어서는 법으로 경쟁관계에 있는 집단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집단은 정치 권력과 맞물려 서로 협력하면서 자신의 이권을 넘보는 집단을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이것이 결국은 진보와 보수 진영과 결탁하여 새로운 경쟁과 협력의 관계를 이룬다.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협력의 관계-개인, 사회, 국가가 나아가야갈 최종의 근본-를 이루고 있는 것은 가정이다. 하지만 이 가정 내에서도 협력과 경쟁은 자연스레 존재한다. 엄마와 아버지는 서로 협력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후손을 남긴다.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모든 가정 내의 협력에도 모종의 경쟁관계는 성립된다. 자손이 자신을 닮기를 바라는 마음은 인간 유전자에 내포된 자연성일지도 모른다.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형제자매들도 어린 시절 생존을 위하여 경쟁 관계에 들어선다. 특히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험담하기도 하고, 먹을 것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어릴수록 그 확연한 실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경쟁은 성장하면서 점차 협력의 관계를 구성한다. 이는 가족 내에서의 경쟁관계보다 외부의 경쟁이 더욱 치열하다는 것은 온 몸으로 느끼기에 가족간의 협력이 필수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 때문이다. 이런 경쟁과 협력은 모두 도덕성, 즉 옳고 그름의 문제를 수반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옭고 그르며, 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문제, 막연한 언어상의 문제인 도덕에 대해 짚어보아야 한다.

토마셀로는 ‘사람 사이의 합의된 환각’을 매트릭스라고 표현하였다. 원시 먹이 사냥의 공통된 협력의 의도는 생존의 본능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로 인한 집단의 감정을 느끼고 이를 공유하였다. 이런 감정의 공유가 종교나 사회제도로 발전하였고,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다시금 그 집단 감정과 제도에 순응하기 시작하였다. 현재의 모든 경쟁은 생존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터 리처슨과 롭 보이드는 문화적 혁신의 진화는 생물학적 혁신의 진화와 닮았다고 했다. 다윈의 진화론과 더불어 인간은 타인과 경쟁하며, 집단을 형성하고 집단은 이웃 집단과의 경쟁을 한다. 경쟁에서 승리한 집단은 더 큰 집단으로 결집하는 것이다. 또한 집단을 구성하는 각 개인은 집단 속에서 자신의 상징과 존재를 드러냄으로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소속을 보여주고자 한다. 인간은 살기위해 경쟁하며 살기 위해 협동하는 유전적, 문화적 진화를 겪는다. 지금 우리의 분열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생존의 문제이다. 진화심리학자 레슬리 뉴슨은 “집단 간 경쟁은 자원의 효율적 활용으로 자손 번식을 위한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현재의 갈등을 우리는 뛰어 넘을 수 없다. 끊임없이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진화하고 문화적으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수퍼맨이 되고자 한다. 육체적으로는 타인보다 강해지길 바라며 정신적으로는 타인에게 존경받고자 한다. 이것이 인간의 경쟁과 협력을 이끌어 내는 방어기제이자 공격기제이다. 육체적 능력이 떨어질 때는 협력하고자 하는 유전적 발현이 나타나며, 육체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믿는 순간 경쟁하고자 한다. 반대로 정신적 능력이 떨어지면 경쟁하고자 하고, 뛰어날수록 협력을 이끌어내어 추종받고자 한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도덕성의 내면이다. 결국 이기주의와 이집단주의는 개인으로 살아남지 못하는 인간이 군집을 이루면서 군집 내에서 새로운 이기주의와 이집단주의로 나누어진다. 조너선 하이트가 <바른마음>에서 말했듯, WEIRD(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Domestic)한 사람들이 이기주의와 이집단주의 성향을 강하게 띄게 된다.

많은 진화론자와 정신분석학자,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도덕성에 주제를 자신들의 연구 영역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뒤르켐은 “인간은 개별적 존재이자 커다란 사회의 부분” 이라며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는 2가지의 사회적 감성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며 개인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과 사회의 연결성을 중요시하여 전체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머슨과 다윈은 인간은 자연에서 스스로 자연과 하나되는 직관을 가지며, 광대함과 수용의 필요성을 깨닫는다고 주장하며, 자연과 동화되면 군집의 성질이 일어나고, 그저 개체는 전체의 일부임을 깨닫고 된다고 하였다. 결국 집단이란 자아의 회로를 닫고 광란의 댄스파티를 즐기며 세상사를 경험하는 환각제이다. 재벌이나 지도층이 쉬이 환각제에 빠지는 이유도 그들만의 그룹핑을 통해 집단의 체계를 강화하기 위함이다. 강한 집단에 소속된 개인은 사회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펼친다. 개인은 경쟁을 통해 이미 완성되어 있는 그룹에 몸 담기를 바라고, 그것은 과도한 경쟁으로 이어져 기본적인 도덕성조차 잃어버리게 한다. 개인의 도덕성 망각은 그룹 내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그룹에 들어간 개인은 타인의 평가, 즉 그룹과 개인에게 내려지는 시선을 두려워하며 도덕적으로 보이길 원할 뿐이다.

인간은 무조건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기 집단에 대한 편향적인 사랑, 서로에 대한 동질감에 대한 사랑, 운명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집단에 무임승차하는 개인에게 억제를 통해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을 성취하려는 존재이다. 결국 사람에 대한 사랑, 기본적으로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은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도덕성이란 나를 넘어 무언가를 찾는, 나아가 다른 이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으로 본다면, 사전적 정의-웹스터사전-인 올바른 일을 하는 것, 또는 올바르게 혹은 정의롭게 하는 것이란 말 역시 <시간과 공간에 따른 정의에 따라> 라는 보완적 수식어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도덕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우리는 동물과 인간을 비교한다. 동물이 도덕적인가? 동물과 인간의 구분은 자연법칙에 지배당하느냐의 문제인가? 죽음에 대한 인식이 구분의 기준이 되는가? 라는 몇 가지 잣대로 인간은 집단의 수를 키우고 집단 사이에서 지배적 위치를 가지고자 도덕성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 또는 도덕적이라는 말은 언어의 특징을 이해해보면 정의할 수도 없으며 정의하려고 해도 안 된다. 언어란 존재에 대한 인간의 정의에 불과하다. 내가 지금 돌을 본다고 한들 그것이 어떻게 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돌이라는 소리 언어를 사회적 약속으로 하고 돌이라는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불과하다. 언어는 실제에서 시작하여 추상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존재하지 않는 추상에 대하여도 우리는 정의를 내린다. 결국 도덕이란 말 자체도 인간의 정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과연 도덕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도덕적인 마음이란 어떤 마음을 말하는 것인가? 감히 말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가장 도덕적인 행위이며, 지금 나의 선택이 가장 도덕적이다. 지금 내가 선택하는 일이 도덕적이지 않다면, 그 선택을 한 자신에 대한 부정을 하는 꼴이다. 때론 사회적 억압, 어쩔 수 없는 선택에 의해 지금의 행위를 한다고 변명하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또 다른 변명을 늘어놓게 될 것이다. 변명을 하는 순간 자신은 말에 사로잡혀 당시의 자신은 도덕적인 선택을 했다고 자부하게 될 것이다. 물론 비도덕적 행위이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행한 행위에 대한 변명도 이미 도덕이라는 명분하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경쟁, 협력, 도덕의 문제는 누구와 손을 잡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결국 도덕은 본능이며 살아가기 위한- 지금 현재의 시간과 지금 이 곳의 공간에서- 진화의 도구에 불과할 따름이다.

초등학생 아들 둘이 <아름다운 가치사전-최인선 저>를 읽고 마음에 드는 가치를 선택해서 옮겨 적기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고른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양심이란 전철이나 버스에서 노약자석에 앉지 않는 것! 양심이란 문방구에서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 많이 받았을 때 돌려드리는 것. 양심이란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지 않는 것. 쓰레기통이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

공평이란 강아지와 고양이를 똑같이 사랑해 주는 것. 강아지 밥을 줄 때 고양이 바도 같이 주는 것. 공평이란 필요한 사람에게 더 많이 주는 것. 공평이란 책을 옮겨 놓을 때 형은 책을 다섯 권씩 나르고, 나는 세 권씩 나르는 것.

생명존중이란 우리가 가까이 있는 생명을 잘 보살피는 것. 생명존중이란 고라니나 꿩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아빠가 차를 천천히 모는 것. 생명존중이란 눈 속에 갇힌 아기 산양을 구조하는 것. 생명존중이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어떤 생명을 무관심하게 보지 않는 것.

아이들을 위한 글 속에서 우리는 교양있는 성인들이 <있는 체>하는 태도에 일갈을 날릴 필요가 있다. 내 눈에 보이는 작은 마음적인 행위조차 제대로 행하지 못하면서 지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멋진 말로 타인을 현혹하려고 한다. 인간의 도덕성은 태어나서 0에서 시작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인곡선과 같다. 마치 바닷물의 조석과 같이, 모든 생명의 탄생과 죽음과 같이, 밤낮이 바뀌고 일년이 바뀌는 것처럼 모든 것은 최고점과 최저점을 찍어 반복되어 돌아간다. 어떤 이들은 최고점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도덕성의 최저점에서 생을 마감할 지도 모른다. 과연 누가 도덕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정의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살아가는 군집 동물이다. 그러나 그 집단 내에서도 경쟁과 협력을 통해 생존과 자손 번식의 확률을 높이고자 하는 유전적 암호를 지닌 생명이다. 자연히 인간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의 도덕에 대한 흐릿한 수치를 매길 뿐이다. 지금은 비록 도덕성이 떨어지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으나, 지금의 선택이 시간이 흐른 뒤 높은 도덕적 선택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수많은 연구결과를 통해 인간을 평가하고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들이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과연 인간이 인간을 평가하고 정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인식 자체가 언제나 시간과 공간에 따라, 생존의 여부에 따라 변한다면 ‘도덕성’ 역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달라지게 마련이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화는 생물학에서 시작하여 사회, 문화적 진화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진화하고 변화하는 인간은 ‘존재’에 대한 정의와 도덕 윤리에 대한 어떤 말도 쉬이 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진실일 것이다. 도덕성이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으며, 무엇이 도덕적 행위인지에 대한 정의도 시간과 공간에 따른 선택의 문제이다. 도덕적 행위는 나와 집단, 집단과 집단 간의 선택에 따른 문제로 귀결되며, 이 역시 시간과 공간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지금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지금 당신이 느끼는 그 감정, 그리고 그 복잡한 감정에서 무엇이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그것이 도덕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진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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