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게 잘 걸러진 탁주처럼 삶의 군더더기와 맛을 아는 사람. 한 때는 누룩이었으나, 그 이전에는 한 줌의 쌀에서, 애초에는 쌀을 구성하는 작은 분자에 불과했던 사람. ‘나’라는 사람은 본시 이 무한한 우주의 한 줌 알갱이에서 지금의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한 덩이의 고기이기 이전에 무한한 우주처럼 나 역시 무한한 힘을 가진 작은 우주를 형성하고 살고 있다. 우주의 시작이 하나의 먼지였고, 지구의 역사는 그 먼지가 모여 폭발하면서 시작되었다면, 나의 시작은 작은 알갱이였고, 그 알갱이가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잘익은 탁주 한 잔을 마셔보았는가? 한 알 한 알의 구수한 내음이 코 끝을 간질이고, 그 한 알이 혀 끝을 스치면서 우리는 인생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알갱이 하나를 우리는 탁주라 부르지 않는다. 나라는 인간 역시 단 하나의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 잘 익어가는 탁주가 조금 더 익으면 새큼한 식초로 변하듯 나 역시 지금의 나를 어찌 무엇이라 규정할 수 있겠는가? 한 톨의 쌀이 효소를 만나 잘 발효되고, 잘 발효된 그 쌀이 누룩이 되고 그 누룩이 탁주로 변하고 그 탁주가 다시 식초로 변하고 다시 식초는 또 다른 무엇으로 변하여 증발하여 사라지듯 나라는 인간도 그렇게 끊임없이 변해가고 진화해가는 생명에 불과하다. 아주 긴 세월을 변화하고 진화해 온 우주의 역사을 나는 짧은 백년도 되지 않는 시간에 그 긴 우주의 역사를 내 한 몸에 다 드러내고 있으니 나는 또다른 우주이다. 우주의 작은 항성과 행성들은 모이고 흩어지며 새로운 하나의 형태를 갖추고, 작은 분자 하나는 원자로 나누어지면, 그 원자는 중성자와 전자와 진자로 나누어지지 무엇을 무엇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 진실일 것인데 우리는 굳이 그 무엇이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고 얄팍한 인간의 우세함을 내세워 우주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사람인가? 어찌 나를 사람이라 칭할 수 잇는가? 인간의 정체성을 논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이 벌써 자신이 인간임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사람이라는 하나의 개체 사이에서 존재하는 또 다른 하나의 개체.
따뜻한 커피 한잔은 커피 분자와 물분자가 서로 만나 얽히고 섥혀야만 커피가 된다. 커피 분자 하나를 맛보고 우리는 그것을 커피라 부르지 않는다. 탁주는 쌀이 발효되어 만들어 진 것이나 우리는 쌀 한 톨을 탁주라 부르지 않는다. 나라는 사람 역시 혼자 존재하는 고독을 즐긴다고 하여 인간이라 부를 수 없다. 인간이란 사람이라는 한 개체와 개체 사이에서 이리저리 튕기고 부딪히며 만들어 내는 자아를 인간이라 부를 것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 역시 혼자 있어 수많은 사고를 한다고 한 들 결코 인간이 될 수는 없다. 내 살점을 하나 떼어 내면 그것은 생명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살점이 내게 붙어 있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생명이라 귀이 여긴다. 바위의 알갱이 하나, 한 방울의 물을 우리는 생명이라 부르지 않는다. 목욕탕에서 벗겨낸 한 줌의 때를 생명이라 부르지 않지만, 그 때조차도 나의 몸에 붙어 있는 순간은 세포라는 이름의 생명을 얻는다. 지구는 생명인가? 지구는 숨쉬는 생명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지구라는 우주의 작은 세포가 우주와 함꼐 생활하며 자신의 영역을 갖추고 살아가기 떄문이다. 그러나 지구도 하나의 먼지로 사라진다면 , 또는 우주의 다른 영역으로 벗어난다면 생명이 아니다. 단세포 생명이 다세포 생명으로 그 자리를 매김하기까지는 수많은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