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책을 만나다

이 글을 썼던 2년 전, 이제 꼭 8년이 남았다.

by 말글손

따뜻한 햇살 아래, 날리는 벚꽃 잎이 살랑, 얼굴을 덮은 책 속으로 날아든다. 볼을 간질이는 꽃잎을 가만히 손바닥에 올려놓고 바라본다. 나지막한 작은 황토 집 마당 한 쪽을 차지한 벚꽃나무는 그 겨우내 키워낸 자식을 자연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책상 위의 쓰다만 원고지는 바람에 살살 날려 저절로 몇 페이지가 넘어갔다. 동네 아낙들의 웃음이 길 따라 들려온다. 늦은 배움에 밤새는 줄 모른다고 하더니, 금요일마다 토속적인 작은 정원에는 아낙들의 낯선 이국의 소리가 흐른다. 아낙들은 꼬부랑글씨 배우는 것이 왜 이리 재미있냐며, 친구랑 손잡고, 심지어 시어머니와 손잡고 놀러온다. 오두막 같은 작지만 도서관 닮은 황토 집, 채 스무 평도 되지 않는 마당과 마당에 있는 온갖 자연이 좋단다. 그리고 그 자연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것이 행복하단다. 정보를 나누고 배우고 익히니,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게 된단다. 나 역시 이들을 만나는 것이 햇살 받은 원고지가 펜촉을 만나듯 반갑고 행복하다. 영어를 재미있게 익히는 법을 주민들과 아이들과 나눈 지 벌써 십년이 넘었다. 아이들은 자라 벌써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각자의 몫을 다하고 있다. 가끔은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찾아오는 녀석들이 반가울 따름이다.

등단을 하고 책을 쓴 지도, 벌써 십여 년이 흘렀다. 아이나 어른이나 짧은 이야기 글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행복을 찾고, 자신감을 찾으며, 무엇보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찾는 동화를 쓴다고 참 열심히도 써내려갔다. 내 이름으로 된 동화책이 벌써 스무 권이나 나왔다. 이웃 집 필리핀 댁 조이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한 편의 동화가 되어 사람들을 만나고,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 한 줄의 글이 되어 사람들을 만난다. 나의 이야기가 재미있다며 좋아하니 이들, 나의 이야기가 작은 감동을 준다며 행복해 하는 이들이 있기에, 구름 이불 깔고 덮은 것보다 내 삶은 감미롭다. 아직 원고지에서 마르지 않은 이야기는 다음 단어를 기다리고 있다. 이번 작품은 누구나 읽으면 영어를 이해할 수 있는 동화책이다. 제목을 어떻게 할까 아직도 고민이다. 오후에 아이들이 놀다 가면, 노을이 산으로 살짝 내려앉을 무렵에야 거리를 걸어보아야겠다. 좋은 생각이 날 듯 하다.

나른한 봄날의 달콤한 유혹을 끝내고, 학생들과 함께한 영어 글쓰기 과제 첨삭과 발표 영상에 대한 검토를 한다. 요즘 아이들은 발음이 참 매끄럽고 좋다. 영어발음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목구멍을 타고 넘는 찬물 한 바가지처럼 시원한 아이들의 소리가 참 좋다. 아니, 오히려 부럽다. 요즘 아이들은 참 재주꾼들이다. 화요일에 진행할 <나도 작가! 릴레이 이야기 만들기> 놀이에서 할 주제와 관련 자료도 찾아놔야겠다. 이래저래 바쁜 사설 작은 도서관이지만,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많다. 2015년, 도서관을 처음 시작할 때는, 발표력 향상과 토론, 두뇌 발달 운동, 영어, 글쓰기 프로그램, 환경체험 프로그램 등을 유상으로 진행했다. 운영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지금은 몇몇 프로그램을 제외하곤 무상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 재능기부를 해주시는 강사님들께 너무 감사하고, 조금씩 도서관 운영에 후원을 해 주시는 후원자님들께도 너무 감사하다. 무슨 복을 타고 났는지,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주린 배가 밥 넣어 달라고 보챈다. 벌써 점심때가 지났다. 오늘도 아내는 갓난쟁이들 돌봐주러 병원으로 갔다. 아내는 간호사 일이 질렸을 법도 한데, 삼십년이 다 되는 세월동안 갓난쟁이들 우유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있다. 국제 모유 수유전문가이자 신생아집중치료 전문 간호사로 가끔은 간호사들에게 강의도 다닌다. 덕분에, 가끔, 아니 자주 내 밥은 내가 챙겨 먹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내가 행복해 하니, 나 역시 작은 일상이 행복할 따름이다. 하긴, 총각 시절 자취만 근 이십년을 해서 밥 차려 먹는 일을 어디 일이라 치부할 수 있는가? 이번 주는 대학에 다니는 큰 아들과 기숙사에 있는 고등학생 작은 아들이 온다. 두 놈이 오면, 오랜만에 탁주 한 잔에 삭힌 가오리 삼합으로 밤새도록 녀석들의 세상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녀석들의 이야기로 되살아난 나의 추억도 함께 나누며 말이다. 내일은 마산문인협회에서 주최하는 문학의 밤 행사가 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하는 나들이다. 한 편의 시와 수필이 가슴을 적시는 따뜻한 밤이 될 것이다.

된장국에 봄나물로 한껏 배를 채웠다. 설거지도 쉽다. 기름기가 없으니 물만으로 깨끗하다. 마루에 놓인 하얀 소식통이 울린다.

“감사합니다. 말글손 다미 도서관, 아인입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경남 교육청 학부모지원센터 박정아입니다.”

강의료가 남들보다 싸서 그런지, 나름대로 내 강의가 재미가 있고 유익해서 그런지 나를 찾는 분들이 종종 있다. 시간만 서로 조정이 된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강의를 나가면 좋은 분들과 만나서 수다도 떨고, 수다를 떨다보면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온다. 어쩌면 강사가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는 것이 강의인 듯하다. 이렇게 행복한 배움과 나눔의 시간을 밀쳐내는 사람들이 있겠는가?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가 사는 동네, 경남을 둘러보러 다닌다. 자연과 사람이 어울리는 곳, 사람 사는 냄새가 오롯이 피는 곳을 찾으면 나는 융단을 탄 듯하다. 자연과 사람이야기를 블로그에 담고, 언론사에 기사를 보내기도 한다. 이렇게 구석구석 다니고, 이런저런 일을 하니 나눌 이야기도 많고 배울 것도 많다. 듣고, 배우고, 익힌 것을 다시 전하고 나누는 일도 가슴 벅찬 나의 일상이 된지 오래다.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합성동 산 3번지에 자리 잡은 지 꼭 십년이 되었다. 지금까지 오는 길은 들짐승 가득 찬 고개를 몇 번 넘고, 때론 거친 바다를 맨 몸으로 뚫고 오는 길이었다. 삶의 가치를 찾지 못해 허비한 청춘, 사업 실패와 사고로 휘청거렸던 경제, 때론 어깨 위의 짐이 무거워 내려놓고 싶었던 순간들이 석유곤로의 불빛처럼 희미하게 스친다. 삶의 희망은 사람이었다. 세상과 일찍 작별했지만 내겐 최고의 농부 아버지, 논밭과 싸워가며 자식 여섯을 키워내신 어머님, 동생들을 돌보다 어이없이 세상을 떠났지만 꿈과 용기를 준 큰 형님, 각자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형제자매, 진석이라면 할 수 있다며 밀고 당겨주던 친구와 지인들, 못난 청춘에게 희망을 놓지 않았던 아내와 처가의 식구들, 지치고 힘들 때면 삶의 지렛대가 되어준 두 아들. 어쩌면 혼자였다면 결코 여기까지 올 수 없었던 지금 이 순간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저녁 햇살 한 줌에 담겨 가슴에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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