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이야기

by 말글손

메마른 흙먼지가 일었다. 남쪽 하늘에서 밀려온 먹구름이 한 낮의 태양을 덮었다. 툭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에 흙길은 먼지를 날리며 푹푹 파였다.

“아빠, 비 와요.” 일곱 살 아들이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비에 놀랐다.

“퍼뜩 뛰자. 아하하, 빗속을 뛰 보자.” 나는 작은 아들의 손을 잡고 달렸다. “아버지, 같이 가요. 와! 빗방울이 진짜 크다.” 열 살 큰 놈도 신이 나서 뒤를 따랐다. 한참을 달렸다. 하지만 굵은 비에 메마른 흙길이 금방 질퍽한 진흙탕으로 변했다. 밭에 다녀오신 어머님이 심부름을 시키셨다. 무거워서 들고 오지 못한 오이를 가지러 가는 길이었다. 무더운 여름날의 날씨를 쉬이 판단 할 수는 없지만, 오랜만에 시원한 소나기에 온 몸이 흠뻑 젖었다. 아이들은 마냥 신이나, 자그마한 물웅덩이에 발을 담그며 신나게 뛰어다녔다. 뭐가 저리 신이 날까? 밭으로 가서 오이를 챙겨 포대에 담았다. 장대비는 어느 듯 가느다란 이슬비로 바뀌었다. 고개를 내미는 햇살에 빗물 머금은 풀잎과 나뭇잎이 빛났다. 언제 더위에 처져 있었냐는 듯이.

“아버지, 저기요. 무지개.” 정말 오랜만에 고향에서 보는 무지개였다. 한참을 아이들과 무지개를 바라보았다. 오이 포대를 어깨에 멨다.

“가자. 할매 기다리시것다.” 젖은 윗옷은 조금 말랐다. 하지만 바지가랑은 노랗게 물들었다. 두 녀석은 온통 노란 물이 들었다. 얼굴에는 흙이 튀어 점돌이가 되었다.

“이 놈들아. 옷에 흙물 들면 빨기 힘들다. 인자 가자.”

“아버지는 어릴 때, 맨날 이렇게 놀았다면서요?” 큰 놈이 예전에 내가 한 말이 기억하고 말을 받아쳤다.

“그거는 그때고. 퍼뜩 가자.”

“아빠, 조깸만 놀고 가면 안돼?” 작은 놈도 더 놀고 싶다고 난리였다.

“그래, 내도 좀 쉬었다 가지. 뭐. 옷도 좀 말리고.” 밭두렁에 고이 자리 잡은 바위에 엉덩이를 내렸다.



‘참, 옛날에는 저 산도 뛰어 다니고, 하루에 몇 번씩 오르락 내리락 했는데, 이젠 밭에 걸어오는 것도 힘드네. 참, 편한 세상에 살다보니 잃어버리는 것이 참 많다.’ 구름이 물러간 하늘 아래, 매미는 제 세상인 냥 떠들었다. 밭두렁을 둘러싼 석류나무 아래 그늘이 참 시원했다.


“아버지 어릴 때는 뭐 하고 놀았어요?” 큰 아들이 작은 바위에 자리를 잡았다. 노란 강아지 닮은 한 놈도 내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왔다.


“덥다. 훈이는 여기 바위에 앉아라.” 드문드문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너머, 파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 결에 바다 속을 유영했다. 삼십년 전의 바다는 지금보다 더 푸르렀다.




한창 무더위가 심한 여름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어른들은 논으로 피를 뽑으로 나갔다. 이번 방학에는 별로 할 일이 없다. 동네 친구들과 못으로 수영을 가기로 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동네 어른들은 천수답에 물을 대기 위해 저수지 공사를 했다. 집집마다 두 명씩 의무적으로 나와 삽과 괭이를 들고 저주지 공사에 투입되었다. 바위를 부수느라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포크레인과 불도저가 마을을 지나다녔다. 하지만, 제방을 쌓고 저수지를 만드는 일은 동네 어른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저수지는 우리에겐 최고의 놀이터가 되었다. 하지만 놀이터라고, 매번 즐거운 놀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름이 되면, 들판에는 우리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어른들이 들에 다녀오면, 식사하기 편하도록 설거지나 해 두고, 소풀을 베거나, 소를 먹이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임무였다.


“석아, 퍼뜩 가자.” 두야는 맨날 나를 재촉했다.


“있어봐라. 아부지가 소 풀 먹이라더라. 소 끌고 가야된다.” 그냥 나가려는 나를 형이 붙잡았다.


“알았다. 그라모 형님은 지게 챙기라. 풀도 해와야 된다.” 나는 마구간으로 가서 소 고삐를 풀었다. 형은 아버지가 만든 작은 지게를 어깨에 둘러멨다. 소를 몰고 못 둑으로 향하였다. 못 위에는 공동묘지도 있었다. 한 여름 태양을 머금은 풀이 쑥쑥 자라면, 소에겐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소를 몰고 가는 못으로 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소가 언제 길가 논의 벼를 한 입 꿀꺽 할지 모르기에 긴장의 연속이다.



소를 몰고 못 둑으로 올랐다. 둑에서 바라본 들판은 녹색의 파도가 일었다 누웠다. 땡볕의 더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고삐를 뿔에 칭칭 감았다. 고삐를 뿔에 감아두지 않으면, 고삐가 나무에 걸려 소가 마음껏 풀을 뜯고 다닐 수가 없다. 소를 풀어두면, 우리의 천국이 눈앞에 펼쳐졌다. 수심이 깊다. 학교에서 저수지마다 꽂아둔 ‘수영금지’ 팻말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대로 옷을 벗었다. 수영복이 어디 있으랴. 필요 없다. 그냥 팬티만 입고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한창을 물에서 놀다 소를 둘러보았다. 소가 보이지 않았다. 내심 걱정은 되었지만 해 질 무렵이면 다시 찾아 올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물 속에서 놀다 지치면 풀을 베었다. 물과 풀을 몇 번 오갔다. 지게는 풀로 가득 찼다. 그런데 소가 오지 않는다. 소를 찾아 온 산을 뒤졌다. 소가 보이지 않았다. 지게를 지고 집으로 힘없이 돌아갔다. 한 여름의 햇살이 산에 걸려 있지만, 앞은 보이지 않았다.

“아부지, 소를 풀어놨는데…….”

“오데다가 풀었노? 고삐는 잘 묵었나?”

“한다고 했는데, 모리것어예.”

온 가족이 소를 찾아 못 둑으로 올랐다. 어른들은 산으로 갔다. 이미 어둠은 사방에 내렸다.

“석이하고 욱이는 내려가라. 위험하다.” 아버지는 다시 산으로 올랐다. 형과 나는 못 둑 아래 돌담에 앉았다. 꼼짝도 하지 않고 까만 하늘만 보았다. 눈 앞에 까만 허공보다 더 까만 물체가 휙 지나갔다.

“행님아. 봤나?”

“뛰라. 퍼뜩.” 죽을 힘을 다해 집으로 내달렸다. 돌부리에 걸려도 넘어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길을 어떻게 달렸는지 몰랐다. 어느새 집에 왔다. 마루에 앉아 어른들을 기다렸다. 열두시가 다 되어 어른들은 소를 몰고 집으로 왔다.

“아부지, 오데서 찾았습니까?”


“이 놈들아. 고삐가 풀려서 나무에 걸려있더라. 오도 가도 못하고. 앞으로는 고삐를 잘 감아줘라. 알것나?”

“밥 묵어야지예. 씻으이소. 밥 챙기께예.” 엄마는 부엌으로 가서 가마솥 두껑을 열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우리는 전날 저녁을 먹었다.

“내일은 논에 피를 좀 빼야 되낀데.” 피곤해 보이는 아버지는 금새 잠이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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