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설날을 맞이하는 자세

by 말글손

경건해야 한다. 매일 뜨는 해라고 하지만 이날만큼은 경건해야 한다. 저 밝은 태양은 설빔이라는 명목 하에 연중 2번의 새 옷을 입는 기회의 첫 번째 기회를 제공하고, 운이 좋다면 고무신을 대신해 새 운동화도 하나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렇다고 설이 마냥 행복한 건 아니었다. 겨우내 새끼를 꼬고 꼬아 봄맞이를 준비하고 나면 새끼 한 통테에 500원을 계산하여 세뱃돈으로 받았다. 지난해 가을걷이를 하고 매상을 하고, 감을 따고, 유자를 따서 번 돈은 형제들 등록금으로 챙겨야 하고, 설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얼마간의 돈을 쓸 수밖에 없으니 설이라고 해서 넉넉하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새 옷과 새 운동화를 하나 장만한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경건해야 한다. 이제는 이런 경건함은 사치요, 그저 평범한 일상의 하루에 불과한, 그냥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나는 그런 시간으로 전락했다. 코로나로 인해 가족도 친척도 만나기 힘들어졌지만, 여느 일상의 하루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하루로 격하된 설날의 위상.


다시 설날에는 경건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이 한 해의 덕담을 나누며 희망을 꿈꾸는 날이다. 경건해야 한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삶을 돌아보고, 조금씩 성장해가는 자녀들의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나를 바라보아야 한다. 설날은 경건한 어느 날의 나를 살피는 날이다.

매거진의 이전글글 잘 쓰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