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이야기-은행잎을 밟으면서

25년 전 어느 날, 나의 가을은 그렇게 지났다

by 말글손

세월이 참 잘도 흘렀다. 세월은 잘 흘렀지만, 내 삶마저 그리 잘 흐르진 않았다. 시골에서 올라온 까까머리 자취생의 삶으로 시작하여 청춘은 그렇게 덧없이 흘러갔다. 차라리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으면 하는 후회마저 남는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십대의 황금기를 공부에 매진하는 것은 너무도 억울했다. 인생은 내가 갈 길을 찾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공부도 잘했지만, 자취생의 인생에서 자유란 멋진 선물이었다. 늦은 가을, 찬바람이 가난한 자취생의 날개를 움츠리게 하던 그 때. 친구들은 소개팅을 한다고 나섰다. 일일찻집에서 진행되는 단체 소개팅. 그냥 놀러나 가자고 마음 먹었는데, 가 보니 남학생이 인원이 모자랐다. 자연스레 나는 그 자리에 합석을 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여학생이 한 명 오지 못한다고 하여, 결국은 7:8의 어정쩡한 장면이 연출되고 말았다.


애초 나는 해당자가 아니니 빠지겠다고 하니, 친구들은 굳이 그럴 필요없다면서, 각자의 소지품으로 정하자고 했다. 남학생들은 자신이 가진 소지품을 꺼냈다. 그때 나는 무엇을 꺼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백원짜리 동전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남학생들은 마음 졸이며 자신의 소지품이 간택되길 기다렸다. 남학생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테이블 위에 나의 동전은 사라졌다. 내심 기대가 컸다. 그리고...


동전을 집은 여학생은 -내 기억이지만 - 7명의 여학생 중에서 제일 키크고 예뻤었다. 잠시의 서먹함이 묻어나는 자리가 끝나고, 곧바로 십대 청춘들의 수다가 일일찻집을 꽉 메웠다. 가난한 자취생은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도시에서 자란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그저 모르는 일이 많았을 뿐이다. 즐거운 이야기에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촌에서 사는 이야기야 끝없이 쏟아낼 자신이 있었지만, 이제 겨우 일년도 되지 않은 도시 초짜는 도시의 삶에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여느 십대들처럼 공부이야기나 긁적거리며 시간을 떼웠다.


그 여학생이 나가자고 했다. 나는 고 1이었고, 그녀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랬던 것으로 기억할 뿐이다. 그렇게 머슥한 마음만 가득 안고 마산 양덕초등학교 앞길을 둘이서 걸었다. 별다른 할 말이 없었다. 은행잎을 밟으면 소리가 난나는 말이 참말이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가 귓전으로 퍼질 때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잠시 정적을 깰 수 있었기에. 그렇게 무슨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녀와 나는 그렇게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다음에도 몇 번을 만난 기억이 나지만, 왜 만났는지, 무엇을 했는지, 왜 다시는 만나지 못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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