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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칠 때 떠나도 욕 먹는다

by 말글손

박수칠 때 떠나도 욕은 먹는다

동네 어귀 돌담은 왜 그리 높았는지 모른다. 어느 날, 동네 어귀 돌담이 왜 그리 낮아졌는지도 모른다. 굳이 모른다고 하는 이유가 모른 척하고 살고 싶은 연유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이라는 글을 적은 적이 있다. “ㅃㄱ 창문 너머/ 빨간 세상/ ㅍㄹ 창문 너머/ 파란 세상/ ㄲㅁ 창문 너머/ 까만 세상/ ㄴㅁㄴ 창틀 너머/ 네모난 세상/ ㅅㅁㄴ 창틀 너머/ 세모난 세상/ ㄷㄱㄹ 세상 너머/ 동그란 세상” 열린 세상은 저렇게 제 멋대로 자유로운데,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만 틀에 갇혀있다. 세상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달렸다. 그렇기에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고,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이다.

세상이 그렇다면 ‘나’의 삶도 그러하겠다. 살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몇 가지 명함을 가지게 된다. 동창회의 회원이거나 총무거나 어느 조직의 국장이거나 회장이거나 하는 따위의 그런 흔한 명함 말이다. 혼자서 사는 세상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조직에 속하는 순간 우리는 각자 하나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만이 가지는 브랜드를 가지고 살아간다. 단순히 ‘상표’라 치부하기에는 현대의 ‘브랜드’는 너무 많은 의미를 지닌다. 부모님이 내게 주신 이름, 국가가 내게 준 주민등록번호, 학교가 내게 준 학번 등 우리는 수많은 브랜드를 가진다. 어찌 되었든, 밥벌이를 위해서 가지는 명함이나, 자기 삶의 방향에 따라 생겨나는 명함으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규정하면서 살아간다.

작든 크든 하나의 조직을 뒷받침하면서도 앞에서 나서야 하는 자리라면 책무를 지니게 마련이다. 당연히 해야 할, 해내야 할 그런 책무. 그 책임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을 옮겨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아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만남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명함을 지니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환대’가 있어야만 한다.

한 사람과의 만남도 한 사람의 일생을 만나는 것이건만, 명함을 가지고 책무를 맡고 있는 사람은 그가 만나는, 또는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의 일생과 함께하는 형언할 수 없는 무게를 느껴야 한다. 그런 자리는 박수를 받을 때 떠나도 욕을 먹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박수받을 수 있겠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박수받지 못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 ‘당연’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쉽지는 않다.

그동안 한 마을의 주민자치회장으로 일하면서 나름의 기대와 나름의 열정으로 쉼 없이 달렸다고 생각했다. 떠나는 순간 어떤 이에게는 박수받아 잠시 우쭐했다가도, 어떤 이에게서 들리는 원망 아닌 원망에, 뒤에서 들려오는 욕에 서글퍼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아름다운 현실인 것을. 그렇기에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살아낸 사람에게서,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앞으로 살아갈 사람에게서 배워야 한다. 자리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사람에 연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떠날 때를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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