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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Jan 23. 2021

드로잉의 예술

청주 국립현대미술관 관람기 2

조각품과 공예품이 전시된 1층 수장고를 관람한 뒤 승강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5층은 기획전시를 하는 곳인데 방문당시엔 전시가 없어서(1/20일부터 한다고 함) 4층으로 내려갔다.

4층 특별수장고는 소장품 관리와 보존의 기능을 우선으로 하기에 작품의 안전을 위해 관람객 수를 제한하고 있다. 그래서 특별수장고 앞에서 직원의 안내에 따라 대기하고 있다가 매시 10명씩만 입장이 가능하며(주말은 시간과 관계없이 10명씩 입장), 실내화로 갈아신고 들어가게 되어있다. 4층에서는 현재 드로잉 소장품을 전시중이다.


드로잉은 20세기에 들어 비로소 그 가치와 평가가 이루어진 만큼 지금도 여전히 현대 미술의 범주 안에서 또 다른 가능성과 잠재성으로 가시화되고 있는 매체이다. 오늘날 드로잉은 단순히 완성작을 위한 밑그림이나 스케치가 아닌 그 자체로 독립성을 인정받고, 다른 영역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조건을 넘어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담아내기 위해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드로잉 소장품>전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드로잉 소장품 800여 점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이중섭의 <소년>(1943-1945), 유영국의 <산>(1970년대 중반), 원석연의 <개미>(1976)를 비롯하여 정탁영의 < 드로잉 2002-3>(2002), 서용선의 <소나무>(1983), 백남준의 <고지도 I>(1988) 등은 모두 작가의 조형 의식과 예술적 실험 과정을 목격할 수 있는 드로잉 작품이자, 국립현대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대표 소장품이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이 구축해 온 대규모의 드로잉 소장품을 통해 드로잉에 대한 개념 변화와 양상, 그리고 다양한 관점을 고찰해 볼 수 있다. 이 전시를 통해 드로잉이 선사하는 무한한 다양성과 생성의 움직임, 질서와 혼돈을 마주하게 된다.

1. 기록과 재현
미술가들은 주어진 조건과 상황에서 세상과 마주했거나 순간적으로 반응했던 모든 흔적을 그리기'라는 행위를 통해 기록하고 재현해 왔다. 전통적 개념 안에서의 드로잉은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관찰력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미술의 기본 작업으로서 의미가 있다.

이 코너에서 관심있게 본 작가는 변월룡(1916~1990)이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알려진 러시아에서 활동한 한국인 화가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의 거장으로 꼽힌다. 1953년 6월에서 1954년 9월까지 짧은 시기동안 북한에서도 활동했는데, 이때문에 남한에선 그간 알려지지 못했다. 2016년 변월룡 탄생 100주년을 맞아 덕수궁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기념전시회를 열었을 때 가서 보고 그의 그림이 지닌 매력에 푹 빠졌기에 이번 드로잉에서도 관심있게 봤다. 근원 김용준, 화가 배운성, 송정리 소녀, 앉아있는 소녀의 모습을 뎃생으로 그린 작품들인데 섬세한 필치와 세밀한 묘사가 관람객의 눈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2. 드로잉의 재정의
드로잉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매체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진 만큼 오랜 시간 회화의 부차적인 작업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드로잉은 매체가 지닌 독창성과 잠재성을 바탕으로 현대 미술의 대안적 출구가 되었다. 그것은 때로는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이며, 또 때로는 지극히 내밀하고 개인적이다. 종착점이 아닌 출발점으로서의 위상을 갖는 드로잉은 ‘날 것이 지닌 미학적 가치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 코너에서 눈길을 끈 것은 무주 프로젝트 드로잉 26점 중 일부를 전시한 건축가 정기용의 작품이다. 1996~2006년까지 무주에서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를 했던 정기용의 드로잉이 전시되었다. 정기용(1945~2011)은 인위적 건축을 배제하고 자연이나 주어진 환경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이다. 그래서 그를 '흙 건축의 대가', '생태 건축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가 우연히 무주와 건축적 인연을 맺은 뒤 '무수동 예술인 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1년여 동안 작업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96년부터 10여 년간 무주에서 건축 활동을 하게 되었다. 적상산과 구천동 계곡을 즐겨 찾다보니 자연스레 무주를 자주 가게 되었는데, 무주 곳곳에서 만나는 독특한 건축들이 정기용 건축가의 작품이란 사실을 알게 되어 꼼꼼히 쳐다보게 되었다.

3. 확장하는 선
이제 드로잉은 단순히 표면 위에 선을 긋는 행위를 넘어 지우고, 자르고, 붙이는 행위로 확대되었다. 또한, 종이와 연필은 사람과 환경으로, 과정의 전개는 신체의 움직임으로 나아갔다. 동시대 미술에서 드로잉은 매체 - 혼성적 특성과 함께 드로잉의 개념을 무한대로 증폭시키며 표현의 가능성을 점차 확장한다.

이 코너에는 백남준의 고지도와 단채널 비디오로 만든 송상희 작가의 변신이야기 제 16권이 기억에 남는다. 두 작품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그외에도 우드락을 이용한 전국광의 '매스의 내면'과 판넬에 마분지를 오려붙인 정탁영의  드로잉. 실리콘 탁구공을 이용해 만든 윤동천의 통계2-1(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재임기간) 등 독특한 소재를 활용한 작품들이 많다.

4. 주요작가 드로잉
국립현대미술관은 1971년부터 영구 소장품을 소장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관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특히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발전 과정에서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던 박수근,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최영림, 이쾌대, 김종영 등의 주요 작가 드로잉은 오늘날에도 작품 연구와 문화유산으로서의 보존, 그리고 전시와 교육의 활용 등을 목적으로 꾸준히 다루어지고 있다.

이 코너는 그야말로 유명화가들의 드로잉 작품을 원없이 볼 수 있다. 이중섭 작가의 작품에는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을 사용해 그린 부인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이쾌대 작가의 '인체의 해부학적 도해서'는 종이에 연필로 그린 인체해부도가 책으로 묶여져있는데, 전체 내용을 영상으로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 있다.

5. 김영주 드로잉
도담(老) 김영주(1920-1995)는 한국 현대 미술의 위상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당당했던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이자 평론가이다. 그는 작품에서 '인간'이라는 일관성 있는 주제를 추상과 구상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양식으로 보여준다. 1950년대부터 김영주먹, 유화, 판화, 콜라주(Collage)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모습을 담은 앵포르멜(Informel) 경향의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밝은 색채와 선묘가 두드러지는 작품들을 발표했고, 동양화 형식을 도입한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는 상징적 도상과 기호들 그리고 즉흥적인 선묘를 강렬하고 다양한 색채 배합으로 나타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03년 김영주의 유족으로부터 드로잉과 판화 130점을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다.

6. 문신 드로잉
문신(1923-1995)은 초창기에 화가로 활동했고 1950년대에는 회화와 조각을 했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조각 작업에 뛰어들었다. “우주와의 음률을 시각화하는 작가"로 평가받는 그는 추상 작가이자 좌우 균형미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업은 세 가지 원천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자연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자연 대상물을 추상화한 작업, 둘째, 기하학적인 도형들을 반복, 변형시킨 작품, 셋째, 구체적인 대상에 근거하지 않고 작가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자유로운 곡선의 흐름을 입체 작품으로 만든 경우로 볼 수 있다. 이런 방향들은 좌우 균형미라는 작가 특유의 조형 어법으로 통일되어 있다. 문신은 조각 작업의 전 단계로 드로잉을 그리곤 했는데, 그의 드로잉은 추상과 구상, 곡선과 직선의 조화와 좌우대칭이 강조된 양식을 보여준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관리하는 드로잉 소장품은 모두 193점으로, 2003년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다.


130점을 기증한 김영주 화가의 유족들이나 193점을 기증한 문신 화가의 유족들이 흐뭇해할만큼 전시장 한 곳에 각각 따로 부스를 만들어 시대별로 작품을 정리하고 도록과 전시회 안내장도 전시한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드로잉의 색다른 매력과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느끼게 해준 드로잉소장품전은 2021년 10월 31일까지니, 전시기간이 끝나기 전에 꼭 관람할 기회를 만들어보시길 바란다.


변월룡 드로잉
이중섭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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