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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Feb 26. 2021

동해를 지키는 대왕암이 두 개네?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

여행을 다니다보면 너무나 유명한 곳이라 당연히 갔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면 그냥 지나친 곳들이 있다. 2월 중순에 다녀온 경주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가 그런 곳이다.

난 경주여행을 두 번이나 다녀왔기에 감은사지를 당연히 다녀왔다 여겼는데 안 가봤고, 남편은 문무대왕릉을 보고왔다 생각했는데 엉뚱한 울산의 대왕암을 갔다와선 경주랑 헷갈렸다.^^;;

감은사는 동해에서 신라 수도 경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에 세워진 절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동해 바다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인 이곳에 절을 창건하였고, 이후 신문왕 2년 (682)에 완성하였다. 이곳은 문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이자 호국사찰, 성전이 설치되었던 사찰이었지만, 창건 이후 절의 역사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까지 몰아낸 문무왕은 시시때때로 쳐들어와 성가시게 구는 왜구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내 달라."라고 유언하였다. 그 뜻을 받들어 장사지낸 곳이 대왕암이다.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은 생전에 직접 대왕암의 위치를 잡고,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용당산을 뒤로 하고 용담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절을 세웠다.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동해 바닷가에 절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지 21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아들인 신문왕이 그 뜻을 이어 이듬해(682년)에 절을 완공하여 감은사라 이름하였다.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감은사는 금당, 강당, 중문이 한 줄로 배치되어 있다. 금당 앞에 쌍탑이 있고 건물들을 회랑으로 두른 통일 신라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를 보여 준다. 금당 밑에는 배수 시설이 있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에 위치한 감은사지에는 현재 삼층석탑 2기와 금당, 강당 등의 건물터만 남아 있다. 금당터로 짐작되는 공간의 좌우에는 13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는 가장 높고 우람한 2기의 삼층석탑이 우뚝 세워져있다. 그리고 감은사지로 올라가는 길목의 오른쪽에 수종을 알 수 없는 고목이 금당 탑마을 당나무로 서있다. 지금은 없어진 금당 대신 당나무 좌우로 보이는 동서 석탑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한참을 그윽하게 쳐다보게 된다.

국보 제112호인 감은사지 동서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세워지는 모든 삼층석탑의 시원(始原)이 되는 석탑이라고 한다. 석탑은 백제에서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단지 재료가 석재일 뿐 전체적으로 목탑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미륵사지석탑이 대표예) 이러한 복잡한 목조 구조를 단순화시킨 석탑 양식이 감은사지석탑에서 시작된 것이다.

감은사지석탑의 양식과 기존 석탑 양식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감은사지석탑의 기단이 이중기단이라는 점이다. 기단이 2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목탑의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중기단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탑신이 지상에서 높아져 전체 구성에 있어 매우 높은 안정감을 준다.

감은사지석탑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화강암보다 입자가 약한 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에서 생산되는 석재를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사리장엄구를 안치한 3층탑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돌을 짜맞추는 방식으로 조립되었는데, 돌과 돌 사이를 연결하기 위하여 쇠로 만든 나비장이 사용되었다. 기단과 1층탑신 그리고 2층탑신 내부는 잡석과 흙으로 단단히 채워져 있다.

대부분의 탑들이 상륜부는 물론 그것을 꿰뚫는 찰주도 남아 있지 않은데 비해 감은사지탑은 동서탑 모두 찰주가 남아 있다. 현재 노출되어 있는 찰주의 높이는 3.9m이나 해체·수리시 찰주를 들어낸 결과 제작 당시 전체 높이가 5.0m에 이르는 주조된 철주로, 사리장엄구가 봉안된 3층탑신까지 연장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59년과 1996년 서탑과 동탑이 각각 해체·복원되는 과정에서 신라 금속공예의 정수인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 다량의 공예품을 통하여 감은사지석탑이 당시 신라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인정받는 뛰어난 예술품이라는 점과 함께 국제적 우수성과 독창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고 한다. (한국미의 재발견-탑. 중에서 참고)

감은사지와 동서삼층석탑을 두루두루 둘러본 뒤 그곳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문무대왕릉으로 갔더니, 꽤 많은 사람들이 나들이 나와 있었다. 시원하게 툭 트인 바다도 구경할겸 가족단위로 오셨는데, 큼직한 창문이 달린 바닷가 카페가 아주 성업중이었다. 문무대왕릉은 직접 가볼 수 없어 바닷가 모래사장에 서서 쳐다보며 기념사진만 찍었다. 이 역사적인 곳을 직접 와봤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남편이 잘못 알고 찾았던 울산의 대왕암은 문무대왕의 왕비가 묻힌 곳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대왕암은 울주군 간절곶과 함께 해가 가장 빨리 뜨는 곳으로 신라시대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어서도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하여 바위섬 아래에 묻혔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2004년 그 주변이 울기공원에서 대왕암공원으로 이름이 바뀌며 새로운 변신을 꾀한 곳이다. 공원 입구에서 등대까지 가는 600m의 산책로는 송림이 우거진 길로, 100여 년을 살아온 소나무 그늘이 시원하다. 봄에는 공원 진입로에 벚꽃이 만개해 장관을 이루는 아름다운 해변공원이다. 공원 내의 해송숲과 대왕암은 동해와 어우러져 울산 12경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그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고 한다

경주에 가신다면, 천삼백 년을 훌쩍 뛰어넘는 시간동안 용당산 중턱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이 땅을 묵묵히 지켜온 두 개의 삼층석탑과 파도치는 바다속에 몸을 담그고 굳건히 동해를 지키는 문무대왕릉을 놓치지 말고 보시길~
시간이 되신다면 울산의 대왕암도 둘러보시고^^



문무대왕릉
울산 대왕암. 펌사진
외동 문무대왕 휴게소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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