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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Oct 15. 2020

호수가 된 바다 위의 망해사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어서 가을이면 지평선축제가 열리는 전북 김제.
그 만경평야 끝자락에 가면 지금은 호수가 된 바다를 볼 수 있다.

보리가 익어갈 무렵인 작년 이맘때 찾아갔던 김제 죽산면에 있는 멋진 메타세콰이어길과 대왕참나무길을 보기 위해 갔다가 이정표에 '심포항'이란 지명이 보였다.

"여기에도 항구가 있네? 가볼까?"

바로 내비를 찍고 심포항으로 향했다.
쭉 이어진 광활한 논들이 펼쳐진 광활면 바로 옆 진봉면에 정말 항구가 있고, 선창가에 배들이 묶여있었다. 다만 생소했던 것은 그 앞이 너른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사실이다.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조성된 포구는 두 개이다. 동진강 하류에 있는 어항이 거전항(巨田港), 만경강 하류에 위치한 어항이 심포항(深浦港).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자리한 심포항은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100여 척이 넘는 어선이 드나들던 큰 항구였으나, 연안 어업의 쇠퇴와 새만금방조제 공사로 인해 지금은 몇 십 척의 어선만 드나들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심포항은 수천만 평에 이르는 심포 개펄의 배후항구로 조개의 집산지였다. 이 일대 갯벌에서 잡은 조개들이 심포항에 모여 전국 각지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심포백합(생합)은 이 지역의 특산물인 고급 조개이다. 그래서 포구 주변에 조개구이집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그것도 옛말이 되어서, 조개구이집들은 여전히 있지만 찾는 손님들은 거의 없어보였다.

군산과 부안을 잇는 새만금방조제 공사가 끝나면서 이곳은 사실 바다로서의 운명을 다했다. 새만금방조제로 갇힌 거대한 담수호로 변했기 때문이다. 어민들의 치열한 생존공간이었던 갯벌은 몇 년 전까지 체험학습공간으로도 많이 이용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갯벌도 찾아보기 힘들다. 서해의 풍광과 심포항에서 바라보는 서해낙조가 장관이었다는데, 이또한 새만금방조제가 들어선 이후 보기 힘든 광경이 되고 말았다. 이곳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이곳을 등져야했을까 생각하면 간척사업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다시금 묻게 된다.

최근 공원을 조성했는지 지지목을 댄 가녀린 벚나무들이 곳곳에 세워져있긴 했으나 그늘이 거의 없어서 차에 앉아서 준비해간 간단한 점심을 먹어야 했다.

항구라는 이름에 기대할 수 있는 바다가 안 보여서 다소 실망한 상태에서 점심을 먹은 뒤 돌아가려다가 근처에 망해사가 있는데, 해거름녘 풍경이 일품이라고 하여 한 번 가보기로 했다. 해질 때까진 당당 멀었지만 높은 곳에 있으니 일단 풍경이 여기보단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망해사는 금산사의 말사로 전북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004번지에 위치한 절이다. 진봉산 고개 넘어 깎은듯이 세워진 기암괴석의 벼랑 위에 망망대해를 내려다보며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만경강 하류 서해에 접하여 멀리 고군산 열도를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는데, 새만금방조제로 바다가 막힌 뒤로는 바다 대신 호수를 바라보는 절이 되었다.

망해사는 백제 때인 642년(의자왕 2)에 부설거사가 사찰을 지어 수도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절 입구엔 이렇게 쓰여있으나, 경내 안의 표지판에는 신라 문무왕11년인 671년에 창건했다고 쓰여있음) 그 뒤 중국 당나라 승려 중도법사가 중창하였으나 절터가 무너져 바다에 잠겼다가, 조선시대 1589년(선조 22) 진묵대사가 낙서전(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8호)을 세웠고, 1933년 김정희 화상이 보광전과 칠성각을 중수했다고 한다.

낙서전은 1933년과 1977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면이ㄱ자형으로 된 팔작지붕이며 건물 한 켠에는 마루를 놓고 그 위에 근래에 만든 종이 걸려 있다고 한다. 건물의 오른쪽에는 방과 부엌이 딸려 있어서 법당 겸 스님의 거처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나 출입문이 잠겨 들어가보진 못했다. 모양이 불규칙한 나무 기둥으로 세워져 자연미를 짙게 풍기는 건물이다.

낙서전 앞에 서있는 두 그루의 오래된 팽나무가 인상적이다. 1589년 진묵대사가 낙서전을 만든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 하니 수령이 적어도 430년 이상이다. 2001년 12월 27일에 도지정 기념물 114호가 되었다. 이 두 그루의 팽나무는 낙서전과 더불어 서해의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하는 망해사의 명물이 되었다. 낙서전 입구 돌계단에 앉아 서해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바람에 나부끼는 팽나무 초록 이파리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마치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망해사는 남북국시대에 지어져 오랜 역사를 지닌 절이지만 규모는 작은 편이어서, 어지간한 암자 느낌이다. 그러나 망해사 절 마당에서 바라보는 만경강과 호수가 된 서해의 일부가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해질무렵 보는 낙조가 일품일 것은 안 봐도 뻔했다.

바다가 보이는 절은 양양의 낙산사가 유명하지만, 그곳에서 보는 것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토요일 오후였는데 마침 사람이 거의 없어서 낙서전 앞에서도 한참, 극락전 앞에서도 한참을 앉아서 바람소리 새소리 들으며 산에서 풍기는 찔레향과 아까시향, 불전에서 흘러나오는 향불의 향기에 취해 강과 호수가 보이는 산사의 오후를 즐겼다.

산신과 칠성, 독성을 함께 모시는 당우인 삼성각은 망해사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있어서 마지막에 올라가보았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극락전 앞에서 보는 풍경이 가장 좋았다. 종각과 5층 석탑, 담장 너머 만경강을 한눈에 보면서 낙서전과 팽나무 두 그루, 마당 한 가운데의 배롱나무와 커다란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는 풍경이 그대로 한폭의 그림이었다. 스님들이 거처하시는 요사채이자 종무소로 쓰이는 '청조헌'이라는 기와집도 오래된 느낌이 운치있었는데, 극락전에서 보는 이 건물의 모습도 참 좋았다.

마지막으로 이 절에 얽힌 재미난 일화 하나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진묵대사가 이곳에 기거하실 때는 절 앞이 바로 바다여서 해산물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하루는 굴을 따서 먹으려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스님이 왜 육식을 하느냐?"며 시비를 걸자,

"이것은 굴이 아니라 석화(돌에 핀 꽃)라오."

했다고 하여 굴을 석화라고 부르게 된 게 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전라도에선 보통 굴을 굴이라 하지 않고 석화라고 많이들 부르는데, 이 말이 바로 망해사를 재건하신 조선시대 진묵스님에게서 비롯된 말이라니~ 어원의 유래까지 알게 해준 멋진 절이었다.


* 망해사 낙조는 시간상 볼 수가 없어서 블로그 이웃 김민기님의 2015년 사진을 모셔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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