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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Oct 15. 2020

소곡주와 견훤왕릉

마을지인 가운데 '세병'이란 이름을 가진 분이 계셨다.

연말에 마을송년회를 할 때면 각자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가져와 한상 떡벌어지게 차려놓고 먹곤 했는데, 여기에 꼭 빠지지 않는 술이 한산 소곡주였다. 세병이란 이름의 주인공께서는 주변에서 술이 들어오면 꼭 세 병씩 받는데, 매년 한산에 사는 지인이 소곡주 세 병을 선물하신다고 했다. 덕분에 그 술을 고스란히 송년회에 가져와서 푸신 것이다.


술을 안다는 분들이

"이 귀한 술을 선생님 덕분에 마셔보네요!"하며 감탄을 내뱉으실 때도 사실 술을 잘 모르는 나는 속으로 '긍가?'했다. 한두 잔 마셔보면 향긋하고 그윽한 듯도 했으나, 워낙 술맛을 모르는데다 도수가 높아서 '독하군'하고 말았더랬다.


그런데 김홍정의 대하소설 '금강'에는 소곡주가 자주 등장한다. 작가님이 소곡주를 꽤나 애정하시나보다~ 그리 생각했는데 2부 미금편에 소곡주에 얽힌 이야기를 듣자니 이 소곡주 또한 소설에서 복선을 까는 하나의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로 끝난 민중혁명이 소곡주 이름의 유래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아래는 소설 발췌내용)


※ 음식이 들어왔다. 향이 구수한 장국에 봄나물을 버무려 한 상 그득했다.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부디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래, 그렇게 하세! 자네도 받고, 자네들도 한 잔씩 하세.”

“고맙십니더. 그런데 저는 이 술은 참 입에 딱 달라붙는 것이 영 아닙니더.”

“입에 달라붙는다고 허믄서 아닌 건 또 뭐라는겨?”

“그러니 말하는 거 아닝겨? 이 소곡주가 입에 땡겨 마셔대면, 그냥 고대로 자빠져부린다카요. 그기 탈이지.”

“그래서 이 술이 앉은뱅이술이잖여. 그것도 몰랐는감?”

“거 신기하고 요사스러부네.”

“이 술이 왜 앉은뱅이술인지 내가 들려줄 터이니 듣게나.”


“오래전 얘기지.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이 땅에 있었네. 잘 지낼 때도 있었지만 싸울 때가 더 많았네. 그렇게 삼국이 싸우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곤 근 오백 년이나 다스렸는데, 왕족들끼리 세력을 다투는 바람에 백성들이 살기가 힘들어졌다네. 그래서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후고구려, 후백제를 세워 다시 세 나라가 싸움을 했지. 후백제가 가장 강했다 하더군. 그 왕이 견훤이라고 하는데, 공산(현 대구)까지 세력을 넓힌 후고구려 왕건을 치러 견훤이 가서 팔공산 싸움을 벌여 크게 이긴 거야. 그때 후고구려 충신 신숭겸이 그 싸움에서 전사할 정도였지. 


왕건이 죽어라고 도망을 가서 안동에 겨우 도착했는데, 견훤의 군대가 거기까지 추격을 해왔어. 왕건이는 이제 끝장이구나 이렇게 낙담을 하고 있었는데, 평소 왕건을 추종하던 안동의 술도가 주인 안중방이란 여인이 있었다고 하네. 그 여인이 찾아와서는 자신이 견훤의 군대를 모두 취하게 만들 터이니 그때를 노려 싸우면 승리할 것이라 했다더군.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상황이 급하니 왕건은 그 여인의 말을 믿기로 했다네. 


그 여인 안중방이 말일세, 아주 향기로운 술을 담아 잔뜩 가지고 견훤의 진영으로 가서 그간의 승리를 축하한다면 술을 내놓은 거지. 그런데 그 술이 향기롭고 입에 쩍쩍 달라붙는 그야말로 최고의 술이었다지 않은가. 견훤의 군대가 그 술을 바닥이 날 때까지 마시고 또 마셨는데, 그만 그때 왕건의 군대가 기습을 한 거지. 견훤의 군대가 일어나 싸우려 했지만 일어설 수가 없었다는 거야.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결국 견훤의 군대가 패하여 겨우 고향으로 도망을 한 거야. 도망가서 왜 싸움이 갑자기 그렇게 되었나 했더니 그 술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 생각한 거야. 그래서 일어나지 못하는 안중방의 술, 곧 앉은뱅이술이 된 거라네.”

                                                                                                             - 금강 2부 미금 중에서 62~64쪽 ※


'산천은 여전한데 인걸은 간 데 없고~'

란 옛말이 있지만 오늘날엔 이도 좀 바뀐 듯 하다.

'산천은 변했어도 인걸의 흔적은 남아 있고~'


견훤은 논산에서 따로 영산제를 지낼 정도로 백제를 대표하는 영웅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견훤왕릉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3에 있는 이 능은 1981년 12월 21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진부 논란이 있으나 금곡리 마을 사람들은 ‘견훤묘’나 ‘왕묘’라고 불러 왔으며 ‘왕총말랭이’라고도 한다.(‘왕의 무덤’과 고갯길을 뜻하는 ‘말랭이’가 붙은 말. ‘말랭이’란 충남·전북 지역에서 흔히 쓰는 말로 고개라는 뜻)

직경 10m, 높이 5m, 둘레가 83m나 되는 거대한 봉분으로 왕릉으로서는 초라할지 모르지만 후백제의 모습을 알려 주는 다른 유적이 없는 가운데서 유일하게 후백제를 기억하게 해주는 곳이다. 옆에 세워진 '후백제왕견훤릉'이라고 쓰여진 큰 묘비는 1970년 견씨문중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이 왕릉이 있는 곳을 향해 올라가는 고갯길이 참 예뻤다. 밑에 차를 두고 그 길을 음미하며 걸어갈 수도 있고, 왕릉 앞까지 바로 차로 가도 주차할 곳이 있다. 올라가보니 능에 입힌 떼에 푸릇푸릇 싹이 올라 보기 좋은데다 주변이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어, 규모는 작지만 잘 꾸며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견훤을 떠올리며 가볍게 소풍을 즐길 수 있는 곳.


견훤은 스스로 일구었던 후백제를 세운 지 45년 만인 936년에 왕건에게 내어주고는 마음의 심화를 달래지 못하고 등창이 나서 마침내 그해 9월 8일 황산불사(기록에 따라 연산불사, 금산사로도 나옴)에서 나이 일흔으로 명을 다하고 말았다. 


권력을 대대손손 누리지 못하고 스러져 간 영웅들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역사서에 나타난 견훤의 이미지가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서에 패자는 승자의 업적을 화려하게 돋보이게 해줄 장식에 지나지않을 때가 많으므로 가릴 건 가려내고 판단해야 실제 역사에 더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후백제를 일궈 한때 후삼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판도를 지녔으나 허망하게 죽어간 한 시대의 인물 견훤을 다시 생각해보는 이유이다. 


내가 찾아갔던 날은 곧 비가 올 것처럼 날이 몹시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야트막한 고개 위에 자리한 이 무덤에서는 맑은 날에는 멀리 전주 부근과 모악산이 보인다고 한다. 임종시 완산이 그립다고 하여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하는데... 


견훤은 아마도 이곳에 누워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던 전주를 그리워하고, 그 나라를 굳건히 지켜 대대로 물려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아들의 손에 석 달 동안 유폐를 당한(금산사 미륵전에서 미륵불 밑으로 들어가면 옛날 철불의 좌대였던 무쇳덩이가 있는데 원래는 지하실이 있었고 그곳이 견훤이 갇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모악산 아래 금산사를 만감이 교차한 채 바라보고 있지나 않을까.



* 소곡주의 유래에 대한 다른 정보

전하는 바로는, 백제 멸망 후 유민들이 주류성에서 나라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소곡주를 빚어 마셨다 하며 조선시대 과거길에 오른 선비가 한산지방의 주막에 들렀다가 소곡주의 맛과 향에 사로잡혀 한두 잔 마시다가 과거날짜를 넘겼다는 일화도 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한산면 호암리의 김영신이 선조들로부터 제조비법을 전수받아 1990년 4월 소곡주 제조면허를 취득, 본격적으로 대량생산을 하였으며 1997년 6월 노환으로 별세한 이후 며느리인 우희열이 대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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