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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Oct 15. 2020

원이 엄마가 누꼬?

안동 원이엄마 테마공원

"웅이 아버지~"로 시작하는 라디오 광고가 한때 사람들 입에 회자되면서 이 문구가 유행어가 된 적이 있다.

웅이가 누군지, 그 아버지가 뭐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웅이 아버지'는 유명하다.


안동에는 이보다 더 유명한 원이 엄마가 있다.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원이 엄마 테마공원도 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원이 엄마를 주제로 한 공원까지 있는 거야?

궁금한 마음에 안동으로 향하면서 처음 행선지로 정한 곳보다 먼저 이곳으로 갔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안동의 숱한 정자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칭한 임청각의 군자정, 하회마을의 옥연정과 함께 고성 이씨 가문의 이굉이 지었다는 귀래정이 있다. 이 귀래정 옆에 조성된 작은 공원이 바로 원이 엄마 테마공원이다. 귀래정을 먼저 둘러본 뒤 공원으로 들어가 한 켠 벽에 새겨진 편지를 보는 순간, 아~~ 하고 떠올랐다. 원이 엄마가 누군지! 원이 엄마는 먼저 세상을 떠난 원이 아빠를 그리며 부부간의 사랑을 구구절절 써서 일명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고 불린 그 연애편지의 주인공이었다.


1998년 4월, 안동시 정하동(정상동) 택지개발과정 중에 무연고 분묘가 발견된다. 주인 없는 무덤이었기에 발굴을 위해 무덤의 외관 뚜껑을 연 순간, 미라상태로 온전히 보전된 시신이 나왔다. 그리고 그 시신의 가슴 위에서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한 통의 편지가 발견된다. 바로 <원이엄마 편지>다.

420년이 지나도 온전하게 모습을 보존한 편지는 가로 58.5cm, 세로 34cm의 한지에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절실한 심정이 한글로 빈 곳 없이 가득 차있었다.


남편을 향한 원이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시신의 머리맡에서 발견된 ‘미투리’이다. 미투리는 보통 삼으로 만들기에 황토색을 띠는데 이 묘에서 발견된 미투리에는 검은색이 섞여 있어서 검은색 실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고 2002년, 한 국내 방송사에서 검은색 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연구소에 실험을 의뢰했다. 그 결과, 검은색 실은 사람의 머리카락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머리카락은 원이엄마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미투리를 싸고 있던 한지에 ‘내 머리 배혀’라는 글자가 흐릿하게 남아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미투리에 남편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것이다.

하지만 결국, 남편은 그 신을 신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180cm의 장신에 31세, 아이를 뱃속에 둔 젊은 아내와 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아들을 둔

고성 이씨 이응태(1556~1586)이다.


고어를 현대의 우리말로 바꾸어서 벽에 새긴 편지 내용을 찬찬히 읽다보니,

이미 내용을 알고 있었음에도 가슴이 메여온다.


* 원이 아버지에게 -  병술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자네 늘 나에게 이르기를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시는고

나하고 자식하고 누굴 의지하며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자네 먼저 가시는고

자네 날 향해 마음을 어찌 가지며

나는 자네 향해 마음을 어찌 가지던고

늘 자네더러 내 이르길 한테 누워서

이보소 남도 우리같이 서로 어여삐 여겨 사랑할까

남도 우리 같은가 하고 자네더러 일렀는데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고


자네 여의고 아무래도 내 살 힘 없으니

쉬 자네한테 가고자 하니 날 데려가소

자네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으니

아무래도 서러운 뜻이 끝이 없으니

이 내 속은 어디다가 두고

자식 데리고 자네를 그리워하여 살까 하노이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찬찬히 와 이르소

내 꿈에서 편지 보시고 한 말

세세히  듣고자 하여 이리 써 넣네

찬찬히 보시고 날더러 이르소

자네 내 뱃속에 자식 나거든 보고 할 말 있다 이르고

그리 가시면 뱃속의 자식 태어나면 누구를 아비라 하라시는고


아무리 한들 내 속 같을까

이런 천지 아득한 일이 하늘아래 또 있을까

자네는 한갓 그리 가 계실 뿐이거니와

아무리 한들 내 속 같이 서러울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소

이 편지 세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 세세히 이르소

나는 꿈에 자네 보리라 믿고 있노이다

몰래 와서 보여 주소

하고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노이다. *


이렇게 애절한 편지를 남편에게 보낼 정도의 아내라면 얼마나 부부간의 사랑이 깊었는지, 그 사랑을 글로 이만큼이나 표현할 만큼 글솜씨가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세상 같으면 이 필력으로 아름다운 사랑소설을 썼어도 대박이 났겠다 싶을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이 편지의 대상인 원이 아버지는 1586년에 죽었고, 이 편지를 쓴 원이 엄마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누구도 원이 엄마에 대한 기록을 해두지 않았으니까.


또 <원이엄마 편지>에는 ‘자내’라는 단어가 총 14번 등장한다. 원이엄마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이다. ‘자내’라는 단어는 현재 아랫사람에게 쓰는 호칭 '자네'로 바뀌었지만 임진왜란 전까지는 상대를 높이거나 적어도 동등하게 대우해 부르는 호칭이었다고 한다. 16세기 조선시대에는 아내가 남편을 ‘자내’라고 부를 정도로 부부 사이가 평등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처럼 기록이란 시간이 흘러도 과거를 되짚어볼 근거를 제공하니 쓰기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낀다.


1998년 발굴 당시 원이 아버지 이응태의 시신은 머리카락, 수염까지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을 정도로 보존이 잘 된 미라상태였고, 시신의 주변에서 총 18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편지는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한글로 쓰여진 <원이엄마 편지>만은 이응태의 시신처럼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편지와 머리카락으로 만든 미투리가 안동대 박물관 3층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는데 코로나기간이라 박물관이나 전시실이 대부분 폐쇄여서 부부간의 애절한 사랑을 담은 유물들을 보는 게 언제쯤이 될지 몰라 아쉽다.


안동의 명물,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척교인 월영교 주변을 걷다보면, 원이엄마 테마길이 있어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자신의 사연을 유리병 안에 적어서 매달아두는 곳이 있다. 누군가를 가슴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전할 길이 없다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곳에 걸어두면 원이 엄마가 굽어살펴 이뤄지게 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 원이 엄마 편지가 발견된 곳은 현진에버빌 104동 서쪽 부근이라 해서 거기도 찾아가 보았다. 

마지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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