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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Sep 17. 2021

시간이 멈춘 마을

서천 판교

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8월초에 내 눈길을 잡아끄는 기사가 있었으니, 8월 2일 서천군 판교역 일원 ‘서천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이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 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됐다는 것이다.


10여년 전 춘장대 해수욕장을 처음 찾아가던 날,

오래되었지만 제법 사람들이 북적대고 기차역까지 있어서 '여기 뭐지?' 했던 곳이 바로 서천 판교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판교랑 이름이 같아서 단번에 기억하게 된 시골 동네가 알고보니 근대역사가 살아숨쉬는 문화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국가등록문화재에 등록되었다니 안 찾아가볼 수가 있나.(30일간의 예고기간을 거쳐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등록된다고 하여, 문화재청에 문의하니 9.28에 회의가 있어서 그때 결정되면 10월중 고시예정이라고)


이번에 등록 예고된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일원 2만 2965㎡ 규모의 서천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에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 건립된 건축물 7곳이 개별 문화재로 포함됐다. 생활사적 변화를 알 수 있는 동일정미소, 동일주조장, 장미사진관, 오방앗간(삼화정미소), 판교극장 등 7건의 문화유산은 근대 도시경관과 주거 건축사, 생활사 요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판교면(板橋面)'의 옛 명칭은 해가 뜨는 마을이란 뜻의 '동면(東面)'이었으나 일제강점기 1942년에 '판교면' 으로 바뀌게 된다. '판교'라는 이름은 1914 년 행정구역 개혁 당시 이곳의 고지명이 '너더리' 즉 '나무판자로 다리를 놓았다' 해서 '널다리'라고 부르는 것에 '널판지 다리'라는 이름에서 유래가 되었다. '충남의 3대 우시장'으로 꼽혔고, 더불어  한산 세모시를 파는 '세모시장'과 ‘도토리묵’ 등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때문인지 판교의 집집마다 달린 명패에는 도토리가 앙증맞게 그려져있다.

서천 판교 현암리는 1930년 충남선 판교역이 문을 열면서 철도교통의 요지로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1970년대 제재·목공, 정미·양곡·양조 산업과 장터가 발전하면서 한국 산업화 시기에 번성기를 누렸다. 판교면의 전성기였던 1930년에는 광천, 논산과 함께 충남의 3대 시장으로 꼽혔으며 특히 '우시장(牛市場)'이 유명했다. 주변의 마을과 지역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는 중요한 장소였다.


그러나 1980년대 도시 중심의 국토개발에서 소외되고 2008년 판교역이 이전하면서 본격적인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서천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근현대기 농촌지역의 이러한 역사 흐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상징성이 크다.

'우시장'이 열리던 시절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어깨가부딪혔다는 판교면은 '우시장'이 없어지고 사람들이 떠나간 지금은 인구가 감소하여  어른들의 이야기로만 그 명성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극장, 기차역, 양조장 등 옛 건축물들이 그 당시의 판교의 규모가 단순히 이야기속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 스탬프 지도를 따라가다보면 여섯 곳의 근대문화역사공간을 만나게 된다. 스탬프 지도 외에도 '판교 시간여행 마을지도'가 마련되어 있으니, 두 지도를 활용해 마을을 돌아다니면 빠짐없이 판교가 지닌 옛스러움을 맛볼 수 있다. (판교역, 판교면행정복지센터, 현암갤러리에 마련되어 있으며, 스탬프를 다 찍으면 판교역과 행정복지센터에 가서 기념품을 받을 수 있다)

순서는 꼭 아래 번호대로 갈 필요는 없다. 나는 현암갤러리에서 스탬프지도를 얻게 되어, 4-3-5-2-1-6 의 순서로 돌아다녔다.

1. 옛 공관 (판교극장)

'공관'이라 불렸으며, 새마을운동 당시 근면·자조·협동이라는 가치 로 건립되었다. 또한 문화생활을 위한 판교극장으로 미산, 옥산, 홍산, 문산, 비인 서면 등 주변 지역 사람들도 영화를 보러 몰려들었 으며, 그 인기는 실로 대단하였다. 영화 상영은 물론 유명 가수들의 쇼프로 공연과 콩쿠르도 열렸지만 1970년대 월남전 이후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극장도 하향길로 들어섰다. 이후 90년대에는 체육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층 유리창에 호신술, 단장술,쌍절곤, 지압, 낙법, 기공마사지 등이 적혀있는 이유이다. 공관 가는 골목의 왼쪽에 있는 판교철공소와 오른쪽의 판교농협창고도 눈여겨볼 만하다. 공관을 지나 20m쯤 직진하면 나오는 굴다리 아래서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말을 하면 소리가 왕왕 울리는 재미난 체험도 해볼 수 있고, 굴다리를 벗어나 펼쳐지는 너른 들판은 가슴이 툭 트이는 느낌이다.


2. 옛 우시장

전국 3대 우시장으로 불릴정도의 규모가 열렸으며 판교리에서 장이 열렸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우시장과 시장 구경 및 판매를 위해 많은 사람이 몰렸다고 한다. 현재는 5일마다 열리는 판교시장이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옛 분위기를 살리고자 '한복입기'를 하고 있다. 우시장을 빙 두른 담에는 수준 높은 벽화가 그려져있는데, 생각없는 분들이 담 앞에다 차를 대놓아서 벽화를 온전히 감상할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시장 한켠에 마련된 커다란 주차장이 있는데 굳이 이렇게 벽화앞에 대서 벽화구경을 방해하나 싶었다.적어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주말엔 주차지도를 좀 해주셨음 좋겠다.


3. 일본식가옥 & 장미사진관

일제시대 '판교면'을 통치한 11명의 일본부호들이 사용했던 건물, 쌀을 빌려줄때 일본말을 시켜 못하면 빌려주지 않는 등 횡포가 심했다. 당시 현암리의 유일한 2층 건물이었다고 한다. 그 후에는 쌀상회, 장미사진관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셔서, 관람시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4. 동일주조장

2000년도까지 박성달 박호성, 박종욱씨가 3대째 운영하던 곳이다. 쌀이 귀했던 시절, 세수 확보 차원에서 밀주라 하여 가정에서 술을 못 담그게 단속하면서 주조장을 통하여 밀가루로 막걸리를 제조, 판매하기도 하였다. 그 후 '통일벼'의 보급으로 쌀 자급자족이 이뤄지자 '쌀막걸리'가 보편화되기도 했다. 이 곳은 막걸리의 재료인 쌀의 원활한 수급을 위하여 쌀방앗간과 같이 양조장을 운영하였다.(주조장 바로 옆에 동일정미소가 있다) 동동주, 탁주, 농주, 왕대포로 불리면서 서민들의 애환과 삶이 녹아 있는 막걸리를 만드는 곳으로 판교에 사람이 많았던 그 시절 주막에 술을 공급하던 중요한 곳이었다.


5. 오방앗간 (옛 삼화정미소)

판교에서 가장 오래된 방앗간으로 삼대 째 운영했던 삼화정미소는 삼형제가 의좋게 운영(三和) 하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담고 있다. 명절에는 100여명의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다른 정미소와 달리 수입전동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현재 정미소 내부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마을주민들은 오씨 일가가 운영했기 때문에 오방앗간이라고 부른다. 삼화정미소의 목재간판은 1950~60년 사이에 단 것이다.


6. 고석주 선생 기념공원

하와이에서 항일운동하다 귀국 이후 군산에서 3.5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판교에 와서 판교교회 설립과 계몽운동, 야학활동 등을 하셨다. 1937년에 서거하신 애국지사 고석주선생을 기념하는 공원인데, 마을 입구에 뚝 떨어져있으니 맨 처음 들르거나, 마지막에 들르는 게 순서상 맞다.


이 건물들 앞에는 스탬프를 찍을 수 있도록 우편함 모양의 도장집이 마련되어 있어서, 직접 스탬프를 찍고 다음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



스탬프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외에도 꼭 가볼 곳이 몇 군데 더 있는데 어쩌면 이곳이 판교마을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본다.


첫 번째가 판교마을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현암갤러리다. 백숙(촌닭)집 옆에 있는 작은 갤러리인데  스탬프지도와 마을지도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현암마을의 유래가 된 현암바위가 이 건물 뒤편에 있어서 갤러리 안의 유리창으로 현암바위를 볼 수 있으며, 근대문화공간을 비롯한 마을 곳곳의 역사를 사진과 함께 자세히 설명한 내용들이 전시되어있다.(아래 사진 참고)

현암갤러리는 새롭게 정비해서 깨끗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촌닭집은 거의 쓰러져간다. 그런데 이 촌닭집에 얽힌 역사가 재밌다. 판교마을에 역이 생기면서 관공서와 상가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관공서에 관련된 업무를 보는 곳들도 생겼다고 한다. 이 건물은 본래 행정문서를 작성해주던 대서방, 책 빌리는 곳으로 사용하였으나 이후 주인이 바뀌어 촌닭집으로 사용되었다. 건물의 뒷부분에 현암바위가 위치하고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건물의 특징은 일자형 구조의 목조건축물인데, 전면부는 상점으로 후면부는 아궁이가 있는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면부는 작게 나누어 여러 점포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다. 현암의 일부를 유리창으로 볼 수 있게 만든 현암갤러리도 이 촌닭집의 전면부를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는 판교중학교이다. 동일정미소를 끼고 왼쪽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추억의 벽화가 정미소 건물과 담벼락에 그려져있으며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정문대신 지키고 있는 판교중학교 운동장에 들어서서 뒤돌아보면 마을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판교에는 초등학교가 마을과 뚝 떨어진 곳에 있고(고석주선생 기념공원을 지나 새 판교역 가는 길에 있다), 학교 이름도 '오성초등학교'여서 좀 생뚱맞다 싶은데, 판교중학교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는 듯해 보인다. 교사는 마침 리모델링중이라 가까이 가서 보지는 못했다.


세 번째로는 구 판교역이 있던 자리와 그 앞의 역전 소나무이다. 1931년 11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 판교역은 일제강점기, 식량약탈과 전쟁물자, 징용, 징병, 위안부 수송을 위해 장항선을 개통하면서 예로부터 저산팔읍(서천, 비만, 한산, 홍산, 임천, 부여, 공주, 남포)보부상의 육로였던 서천·부여 보령의 중심지에 있던 곳이다. 해방 후 '판교역' 은 도시로 향하는 길목이었고, 6.25전쟁의 아픔도 고스란히 겪었으며, 학생들의 통학 열차와 희망과 꿈을 안고 떠나 는 이들의 탈출구 역할도 하였다. 그러다 2008년 11월 27일에 장항선 직선화 공사로 역사를 마을에서 뚝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였다. 지금 구 판교역은 판교음식특화촌으로 바뀌어서 판교를 찾는 사람들의 입맛을 책임지고 있다. 구 판교역 주변에는 기본 40년에서 70년된 맛집들이 즐비하다. 대신 새로 생긴 판교역 주변에는 그야말로 역사만 뗄렁 있고 아무것도 없으니 참고하시길.


구 역전 소나무는 1930년대 신봉균과 박동진 씨가 심은 소나무라고 한다. 천안 광천, 대전 등에서 판교로 장을 보러 왔었는데 하루에 열차가 몇 번 다니지 않아 기다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역 광장 소나무 근처에서 쉬게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고 먹을거리부터, 광대, 약장수, 동동구르무 장수 등이 몰려들어 장사하는 모습이 진풍경이었다고 한다.


역전 소나무는 1930~40년대는 강제징용과 위안부로 끌려가는 우리의 가족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고, 1950년대에는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을, 1960~80년대에는 좀 더 나은 삶과 꿈을 안고 도시로 향했던 수많은 이들의 이별과 희망을 지켜봤으리라. 수령 100년에 가까운 이 소나무를 보면서 판교역을 거쳐간 수많은 이들의 이별, 기쁨, 한, 그리움, 슬픔, 희망, 아픔, 설레임을 떠올려 보는 것도 이 공간이 주는 독특한 경험이다.


네 번째로 구판교역에서 쭉 나와서 바로 보이는 구 적십자사무소와 그 뒤에 있는 구 면사무소도 옛 모습이 그대로 간직된 곳이며, 지금은 다른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1938년 10월 일제는 동면 판교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역 근처 현암리 234-번지로 옮겨 목조 건물로 신축하였다. 주민들이 판교역 주변에 모여들자 신시가지 현암으로 면사무소를 옮긴것이다. 1942년 패망을 앞둔 일본에 의해 '동면'을 판교역, 판교장 이름을 따 '판교면'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주민들은 조선의 통제를 가일층 압박하기 위해 일본사람들이 서천군에서 유일하게 해 뜨는 마을 '동면'을 판교면으로 고치면서, 면 이름을 빼앗아간 가슴 아픈 면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일제 시대에 이렇게 일본에 의해 원래 지명을 빼앗긴 곳들이 많던데 이제라도 옛지명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을까? 이리시가 원래 지명인 익산시로 이름을 바꾸었듯이 말이다. 충남 홍성도 원래 지명인 홍주로 이름을 바꾸려는 노력을 계속 하고 있는 중인데(두손 들어 환영!), 계속 가슴만 아파하지 말고 일제의 잔재를 뿌리뽑을 수 있는 것들은 다 뽑아서 우리 고유의 이름을 회복했으면 싶다.

구 적십자 사무소


다섯 번째로 마을 입구에 자리한 판교교회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애국지사 고석주 선생이 세우셨다는 판교교회가 참 마음에 들었다. 옆 벽면을 가득 채운 예수 그리스도와 양떼들의 그림과 주황색 박공지붕에 연노랑빛 깨끗한 벽에 오종종 나있는 작은 창문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데다가, 가까이 가서 보니 마당엔 보기드문 진보라색 겹무궁화도 활짝 피어 있어서 더욱 이채로웠다.

교회 앞에 걸린 현수막의 문구도 인상적이고.(판교장터 폭격 희생자 추모 위령제 소식과 판교장날 한복 입기를 권유하는 홍보문이었다)


충남도 관계자는 “앞으로 서천군, 문화재청과 함께 서천 판교를 도의 대표적인 근대문화공간으로 조성하고 역사·문화를 엿볼 수 있는 문화재이자 관광지로 널리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충남에도 전북의 군산 못지 않은 근대문화유산을 갖춘 곳이 있으니 잘 조성해서 사람들이 자주 찾는 관광지로 발돋움하길 바래본다.


'판교면 시간이 멈춘마을'은 하루를 머물지 않아도 지나가는 길에 가볍게 들러서 맑은 공기 마시며 여유롭게 산책하며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가까이에 춘장대해수욕장, 장항송림, 서천갈대밭, 국립생태원, 해양생물자원관 등 유명관광지가 많다)


높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옛스러운 분위기, 소소하고 오래된 건물들이 그대로 시간이 멈춘 곳같은 판교에서 여유를 느낀 주말 오후였다.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에서 바쁜 일상에 시달린 당신에게 잠시 여유를 선물해 보는 것은 어떨까?



* 새 판교역에는 서울에서 출발한 무궁화호가 하루에 9번이나 지나간다니 기차여행으로도 적격이다. 새 판교역과 판교 마을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근대문화의 대표건물, 일본식가옥 장미사진관
구 판교역
스탬프투어 완성하면 받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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