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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Sep 10. 2021

믿음으로 돌아오는 곳

김제 귀신사

김제 하면 금산사가 유명하지만 한때 금산사를 말사로 두었던 더 큰 절이 있었다. 바로 귀신사.

"귀신? 귀신이 사는 절이야?" 하고 오해하기 쉽지만 아니다. 歸信, 돌아올 귀자 믿을 신자를 써서 귀신사다. 믿음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이니, 참 좋은 뜻을 지닌 이름인데 발음때문에 오해가 생겼다.

<사색의 향기> 정기상 객원기자는 이 이름에 대해 '사람이기 때문에 방황할 수 있고 사람이기 때문에 후회할 수 있다. 반성하고 돌아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겠는가?'하면서 귀신사의 이름이 참 아름답다고 평했다. 이름이 특이해서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못할 김제 금산사는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6길 40 (청도리 81) 모악산의 서북쪽 능선에 자리한 사찰이다.

2020년 4월, 금산사 다녀오는 길에 왼쪽에 보이는 귀신사 표지판에 궁금증이 일긴 했으나, 4월치고 꽤 더웠던 봄날에 넓디 너른 금산사를 둘러보고 오느라 기운을 다 소진해서 그냥 지나쳤던 곳이다. 그런데 그 뒤로 귀신사 관련된 글이나 이야기를 종종 접하게 되면서 귀신사에 대해 점점 더 궁금해졌다. 스쳐지나가는 곳으로 놔두기엔 우리의 인연이 깊었는지, 믿음으로 돌아온다는 뜻인 담긴 절이어서 자꾸 마음이 끌렸는지 2021년 8월말에 모악산을 돌아 귀신사를 다녀왔다.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며 창건 당시에는 국신사(國信寺)라 불렸다고 한다. 「사기」(寺記)에 따르면, 그후 고려 때 원명대사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이 구순사(狗脣寺)로 바뀌었으며, 조선 고종 10년(1873)에 고쳐 지으면서 귀신사(歸信寺)로 현판을 바꾸었다다.


지금은 조계종 절이지만 원래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정복지를 교화하여 회유하기 위해 각 지방의 중심지에 세웠던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로서 전주 일원을 관장하던 대사찰이었다. 한때 금산사가 이 절의 말사였을 정도로 사세가 컸으며, 고려 말에는 이 지방에 쳐들어온 왜구 300여 명이 이곳에 주둔했을 만큼 규모가 커서 주변 일대에 사찰에 딸린 건물과 암자가 즐비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부근 곳곳에서 석재와 초석 등이 발견된다.


마을 주민들이 절 주위의 논밭을 갈거나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보면 토관이 나오기도 한다. 토관은 절 오른쪽 계곡에서부터 물을 끌어와 절 안의 이곳저곳에 식수를 보내던 상수도관으로, 이 토관들이 뻗어 있는 방향과 범위들을 추적한다면 예전의 절 규모와 건물 위치 등을 밝힐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국도에서 귀신사로 들어가는 길 왼편 논 가운데는 부도 한 기가 있어 청도리 일대가 귀신사의 경역이었음을 말해준다.


지금은 퇴락하여 대적광전, 명부전, 요사채, 그리고 대적광전 뒤편 높은 축대 위에 삼층석탑과 석수만 남아 있는 작고 아담한 절이다. 절 바로 앞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돌계단을 따라 절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계단을 오르면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26호로 지정된 귀신사 대적광전이 사찰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은 부처의 광명이 어디에나 두루 비치며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인데

귀신사 대적광전은 17세기 경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이라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도 부른다. 비로자나불은 부처님의 가장 궁극적인 모습인 진신이자 법신으로 절대 우위의 부처이다.


본래 이 건물은 2층으로 지어졌었으나 조선 순조 23년 1823에 1층으로 낮추어 다시 지어졌다. 대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에 사람 인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처마는 정면이 겹처마이고 뒷면은 홑처마로 처리하였으며, 지붕이 전체적인 비례에 비해 크고 높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棋包 :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 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 부재)를 짜 올린 다포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기둥은 배흘림 양식이며, 공포는 전형적인 다포계의 2출목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정면의 공포는 모두 같은 모양의 우수한 부재로 구성되어 있지만, 뒷면은 쇠서·메뚜기머리·살미첨차가 각각 불규칙하며 조각의 수법도 다르다. 기존 건물의 부재를 재사용하여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공포가 서로 다른 것이 특징이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하였고, 내부 구조에서 내진(內陣) 칸이 외진(外陣) 칸보다 작음으로 해서 내진 칸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이 커 보이는 효과가 있도록 하였다. 기단은 자연석 기단이며, 초석은 거친 막돌을 그대로 쓰고 있다. 귀신사 대적광전은 조선시대 대적광전의 전형적인 형태이자, 조선 후기 대표적인 목조 건물의 하나로 당시의 전통 건축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안에는 보물 제1516호 김제 귀신사 소조 비로자나 삼불 좌상(歸信寺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이 모셔져 있는데, 흙으로 조성한 소조불(塑造佛)로 기법이 뛰어나다. 가운데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이며, 왼쪽의 약사불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치고 수명을 연장해 주는 부처이며, 오른쪽의 아미타불은 죽은 이를 서방 극락 세계로 인도하여 그 영혼을 구제하는 부처이다.


이 삼불상은 점토로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3m나 될 정도로 매우 크다. 허리가 긴 모습과 손 모양 등에서는 명나라의 불상 양식을 엿볼 수 있다. 귀신사 소조 비로자나 삼불 좌상은 소조 기법이 뛰어나고 16세기와 17세기 불상 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대적광전 오른쪽에 요사채가 있으며, 뒤쪽의 명부전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 귀신사 석탑(歸信寺 石塔)이 자리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꼭대기 부위가 크게 손상되었다. 탑의 현재 높이는 4.5m이며, 층마다 탑 몸체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각층 기둥은 넓고 귀퉁이 밑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다. 받침부와 1층 몸체, 각층 지붕은 여러 개의 돌판을 짜 맞추어 만들었다. 고려시대에 지은 탑이지만, 전체적인 조각기법으로 보아 백제시대의 양식을 크게 반영하고 있다.


석탑 앞에는 특이하게 남근모양의 돌이 세워진 석수가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 64호이다. 남서쪽 솔개봉을 향하여 엎드려 있는 이 사자상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이다. 평평한 타원형 받침돌 위에 앉은 사자상은 머리를 치켜들고 앞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사자상의 등위에는 남자 성기 모양의 마디진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위에 또하나의 작은 돌기둥을 세웠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사자상은 이곳 지형의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귀신사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와 배롱나무가 있어 멋진 꽃그늘을 선사한다. 쉬었다 갈 수 있도록 반반한 넙적돌도 마련되어 있으니, 여유가 있다면 한동안 그곳에 앉아서 김제 모악산 능선의 아름다움과 청도리 마을의 고즈넉함을 즐길 수 있다.



석탑에서 내려와 대적광전 왼쪽의 영산전을 지나 주차장으로 가다보면 파초가 우거진 작은 계단이 나오는데, 이 풍경이 꽤나 이채롭다. 마치 조선시대 그림 속에 들어가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대적광전 가는 길에 기와에 그린 그림과 글도 어여쁘다. 이제 갓 피기 시작한 진보랏빛 송엽국, 샛노오란 붉노랑상사화와 함께 보는 맛이 있으니  찬찬히 살펴보시고, 수반에 핀 부레옥잠화와 마당가의 연분홍 꽃범의꼬리도 감상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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