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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Sep 08. 2021

한 달에 세 번이나 갔슈~

논산 명재고택

여름더위가 한창일 때 찾았던 거창 월성계곡에서 계곡물에 발담그고 찬찬히 읽었던 [한옥. 보다.읽다]

이 책엔 다양한 한옥들이 소개된다.

강릉 오죽헌, 구례 운조루, 담양 소쇄원, 보길도 윤선도 원림, 아산 외암마을 건재고택, 예산 추사고택, 창덕궁 연경당, 해남 윤씨 녹우당, 대구 남평문씨 본리세거지, 안동 고산정과 만휴정, 안동 김씨 묵계종택, 임청각, 퇴계종택, 하회마을 염행당 고택, 예천 초간정, 함양 일두고택 등은 가본 곳들이지만 안 가본 곳들도 꽤 나왔다. 책 읽은 김에 하나하나 찾아가봐야지 하면서 고택목록이 적힌 쪽을 접어두었는데, 그 가운데 제일 가까운 한옥이 논산 명재고택이었다. 남편에게 명재고택 이야기를 꺼내니


"거기 유명해~ 드라마 '월간 집'에도 소개됐고. 이제 알았어?"


한다. 나만 몰랐어~--;;

일요일엔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잠깐 다녀오는 식으로 바람을 쐬는 편이라 8월 8일에 처음 다녀왔다. 첫눈에 딱 마음에 들어서 그 뒤로 8월 16일에 또 가고, 8월 28일에 세 번째 방문. 한 달에 무려 세 번을 다녀왔다. 첫 방문은 작정하고 간 것이라면 두세 번째 방문은 근처 지나는 김에 들러서 다른 날, 다른 시각의 명재고택의 분위기를 느껴보게 되었다.


논산 명재고택은 조선 숙종 때 학자인 명재 윤증 (1629-1714)의 집으로 명재 선생 생전인 1709년에 지어진 곳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 190호이다. 윤증의 본관은 파평, 자는 자인, 호는 명재·유봉이며, 성혼의 외증손으로 아버지는 윤선거이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논쟁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명재고택은 조선중기 호서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이자, 전형적인 상류층의 살림집이다. 사랑채 앞 축대와 우물, 연못과 나무에서는 조선시대 정원 조경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며, 계절의 변화에 따른 일조량 및 바람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저장 공간인 광채와 비껴서 배치한 안채(서쪽)의 구조에서는 옛 선조들의 뛰어난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후원의 장독대와 소나무 숲은 실용성과 경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명재고택은 완만한 경사지에 있으며 한옥의 규범을 충실히 따르는데, 집 앞에 넓은 마당과 왼쪽에 정사각형 인공 연못이 있다. 현재 대문 역할을 하는 남쪽 중문으로 문간채가 이어지며 전체 구조는 ㅁ자형이다. 안채는 높지 않은 기단 위에 있으며 가운데 마당을 둔 멀 경(冂)자 형인데, 내외벽으로 가려진 폐쇄적인 공간이 명재의 절제된 미덕을 반영하는 듯 소박하다. 안채의 동쪽 뒤편에는 사당이 있고, 그 앞에는 사랑채가 있다.


현재의 건물은 수리하여 19세기 건축양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건축 기법은 18세기 양식이다. 또한 안채와 사랑채의 평면은 대체로 중부지방 양식을 따르면서도 특이하게 남도풍을 가미한 형태이다. 명재고택은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견실한 형태를 보이며, 보존 상태도 양호해 조선 시대 지방 양반 가옥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고택의 안채는 'ㄷ'자형, 사랑채까지 포함된 구조는 'ㅁ' 자형의 목조 와즙 단층 건물이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는 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보호 받고 살림하기 편하도록 '-'자형 대문에서 안채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게 내외벽을 두었다. 반대로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전면의 농토와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 공적이고 개방된 공간이다. 또한 사랑채의 큰방과 작은방으로 연결되는 미닫이와 여닫이를 겸한 방문은 다른 한옥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성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들어가볼 수 없게 해서 확인하진 못했다.(드라마에 사랑채 내부가 나와서 영상을 통해 볼 수 있었다. 한옥스테이를 하고 있어서 고택에서 하룻밤을 묵으면 다음날 아침 주인장을 따라 고택순례와 설명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한옥. 보다.읽다]책에선 명재고택 안채가 지닌 한옥의 특징을 소개해놨는데, 안채는 후손들이 살고 계신 공간이라 출입금지를 해놓은 탓에 입구에서만 얼쩡대며 살짝 사진을 찍어야 했다. 문화해설사 선생님을 따라다니면 안채로 해서 사당으로 이어진 뒷마당까지 갈 수 있는 것 같은데, 해설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함께 하지 못한데다, 남편이 썩 내켜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먼 발치로만 봐야했다. 나중에 혼자 오게 되면 그때 해설시간에 맞춰서 명재고택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들어볼 요량이다.


명재고택은 한옥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너른 앞마당 입구에서 고택을 바라보면 마당을 빙 둘러 서있는 오래된 배롱나무에 핀 꽃들과 왼쪽 앞에 있는 연못의 풍경이 압도적이다. 고택에 들어서기 전 입구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게 되는 이유다.


정사각형 모양의 연못 입구엔 커다란 배롱나무가 있고 그 아래 피어난 연꽃이 또한 눈길을 끈다. 내가 처음 갔던 날엔 딱 한 송이 백련이 피어있었는데, 그 모습이 고혹적인데다 향이 짙어서 또 한참을 머물렀다.


연못을 따라 서쪽으로 걷다보면, 고택 옆에 위치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18호 노성향교가 보인다.

노성향교는 본래 노성면 송당리 월명곡 근처(현 노성초등학교)에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며, 고려 우왕 6년 (1380)에 건립된 것으 로 추정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을 겪은 후 1800여 년경 현재의 자리로 향교를 이전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연대나 이전 사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명륜당 현판에 남아 있는 숭정 4년(1631)에 현감이 문묘를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대성전에 공자를 중심으로 증자, 맹자, 안자, 자사의 서위를 모시고 동무에 송조 1현(정이)과 동국 9현을, 서무에 송조 1현(주희)과 동 국 9현 등 모두 5성과 20현의 25위를 모셨다는데 코로나로 인해 들어가서 볼 수는 없었다.

다시 연못을 따라 나와서 마당을 지나 고택을 살핀 뒤 맞은편에 보이는 수백 개의 장독대가 또한 장관이다. 장독대는 수령 400넘은 느티나무 보호수 아래 넓게 펼쳐져있어, 명재고택 사색의 길을 따라 전망대와 선비계단 쪽으로 걸으면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정말 멋지다. 드라마 '월간 집'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명재고택에 자원봉사를 가서 이 장독대의 항아리를 행주로 하나하나 닦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토록 정갈하게 관리하려면 참 많은 수고가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장독대 가까이 가면 어디선가 짜디짠 조선간장 냄새가 솔솔 나기도 한다.

장독대 앞에 있는 작은 나무건물과 거기에 늘어진 능소화를 보는 맛도 일품이다. 6월부터 피기 시작한 능소화가 8월이 지나도록 참 오래오래 피어 눈호강을 시켜준다. 그 뒤로 보이는 초가에도 후손이 살고 있다고 하여 못 들어가게 나무막대기 하나를 입구에 걸쳐놓았다. 그리고 사색의 길 입구에 있는 초가는 작은도서관인데, 여기도 코로나로 인해 문이 잠겨있어 밖에서만 볼 수 있어 아쉬웠다. 언제쯤 코로나 따위 상관없이 내부시설도 볼 날이 오려나...

고택 앞에 마련된 주차장 아래로 내려가면 열녀 공주이씨 정려가 있다. 고택과 뚝 떨어져있어 지나치기 쉬운 곳이라 나도 두 번째 방문 때 가보게 되었다. 이 정려는 앞서 여행에세이에 썼던 연산 양천 허씨 정려각과 대전 고흥 류씨 정려각과 달리 비석이 따로 없는 점이 특이하다.


공주 이씨는 공주의 토성이자 명문가인 생원 이장백의 딸로 문경공 미촌 윤선거의 처이며 명재 윤증의 어머니이다. 윤선거는 김집의 문인으로 1613년(인조 11년)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벽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1636년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유생들을 거느리고 명에 대한 예를 지키자고 상소했다. 그 해 겨울 청태종이 대군을 거느리고 병자호란을 일으키자 윤선거는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성문을 지키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씨 부인은 오랑캐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으리라 하고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윤증은 학문이 높아 현종 때 3사에 천거하여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 으나 부임하지 않아, 왕이 직접 관직에 오르기를 명하니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순절에 대한 보답이 아닌 줄 아옵니다." 하며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 덕망이 모든 선비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 '백의정승'이란 대우를 받았다. 그 후 공주 이씨에게 정경부인을 증직하였고, 1681년(숙종71년)에 명정을 내려 정려를 세웠다.


처음 갔던 날은 날씨가 흐려서 멋진 풍경을 흐린 하늘 아래 봐야 하는 것이 무척 아쉬워, 날 좋을 땐 다시 와야지 했던 건데 16일에 찾았을 때는 좀더 날이 좋았고, 28일에 찾았을 땐 확실히 좋은 날씨여서 각기 다른 날의 풍광을 지닌 명재고택을 둘러볼 수 있었다. 명재고택의 여름 풍경도 멋지지만 소개책자에 나온 가을풍경도 아름다워서 단풍이 들 때쯤 또 찾으려 한다. 그 날이 기다려진다.


* 근처에 궐리사와 종학당, 돈암서원이 있는데 이곳들도 차근차근 여행에세이에 담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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