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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그미 Sep 23. 2021

기록의 힘

최은희씨와 다산 정약용

최은희?

'아시아의 인어'라 불리던 수영국가대표선수이자,

가수 유현상의 부인이며, 문체부 차관?

아니다. 그녀는 보통사람 최은희다.

게다가 허지웅의 책 <살고 싶다는 농담>에 나온 이 이름은 본명이 아닌 가명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8층으로 돌아가다' 편에서 처음 나온다.

허지웅 작가

8층을 눌렀다. 익숙한 버튼이다. 이 버튼의 중앙에는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작은 돌기가 있다. 플라스틱 사출 흔적인지 뭔가가 묻어 오랜 시간 굳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게 거기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망설이다 보면 반드시 저 돌기와 만나게 된다. 손가락을 가져다 댄 채로 가만히 있기도 하고 손톱 끝으로 튕겨보기도 한다. 그렇게 누르기를 수 없이 주저하다 눌렀던 버튼이다. 가고 싶지 않은 곳. 병원 별관 8층 병동. 내가 도대체 여길 왜 다시 왔을까.(책 속에서)


저자는 혈액암 투병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하며 많은 메시지를 받았다. 처음엔 꼬박꼬박 답장을 보냈지만 하루에 500개가 넘는 메시지를 받게 되자 답장을 포기했다. 그래서 사서함을 만들어 대화가 절실한 누군가가 사서함에 이야기를 남기면 그걸 듣고 때로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기도 하고 통화를 하는 쪽으로 바꿨다.


사서함 대화를 하다 보니, 배우고 느끼는 바가 많아졌고  반드시 이루고 싶은 어떤 꿈이 생겼다. 나 같은 이십 대를 보내는 청년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그런데 자신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꿈으로 어렴풋이 남겨두기보다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사서함 대화중에 만난 이가 바로 최은희씨다.


어느날 사서함에 녹음된 이야기를 듣는데 무뚝뚝한 경상도 억양의 청년이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자신이 앓았던 림프암으로 투병한 지 2년째라고 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아, 병원에서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저자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절박한 심정에 그가 다녔던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니까 꼭 병문안을 와달라는 사연이었다.


난감했다. 오죽하면 이런 부탁을 할까 싶었다. 그 병동에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던 저자는 망설였다. 그리고 이게 어머니 부탁인지 그냥 아들 마음인지도 알 수 없어 망설이다 전화를 걸어 청년과 이야기를 더 해본 뒤 문병을 가기로 결정하고, 별관 8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다시 선 것이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머리에 비니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쓴 최은희(가명)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셨다.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가족들과 사진도 찍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몇 년 전 이혼해서 남이 되어 따로 살다가 어머니가 암에 걸린 뒤로 아버지가 찾아와서 돌보기도 하고 병문안도 온다고 했다.


저자는 가족의 신화에 대해 믿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가족이라는 말 앞에서 무마되어버리는 수많은 것들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망치면 망쳤지 좋게 만들지는 않았다는 마음에서다. 하지만 이 가족의 사정 앞에 크게 감동받았다. 그는 이런 게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 혈연 공동체라는 이야기를 흔히 하지만 저자는 가족이 혈연 이전에 사연으로 유지되는 운명 공동체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작 그는 해체된 상태로 그냥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가족의 일원이라서 그런지 우연하게 하루를 섞은 이 가족이 부럽고, 기쁘고, 귀하게 느껴졌다. 8층 버튼 앞에서 머뭇거렸던 손가락의 감각은 잊혔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사람을 충만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는데, 그 일이 바로 그런 경험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크고 격정적이며 값비싼 것보다 이와 같은 경험들이 쌓였을 때 방향감각이 생기고 등이 곧게 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청년이었을 때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어머니는 발병한 이후 처음으로 수치가 호전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나아질 일만 남았다. 최은희 어머니의 완쾌를 바라고 기다리겠습니다." 란 문장으로 '8층으로 돌아가다'란 글은 끝을 맺는다. 그러다가 책의 뒷부분에 그녀의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보통 사람 최은희' 편에서.


여기에는 1965년 3월 9일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에서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그녀의 굴곡진 일생이 쭉 펼쳐진다. 그리고 그의 방문 뒤로 병세가 극적으로 호전되어 회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그녀가 코로나로 인해  병원 일정이 한 주 뒤로 밀리면서 다시 병세가 악화되서 결국 부처님 오신 날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 나온다. 원수가 되어 헤어졌던 그녀의 남편을 비롯해 다시 하나로 뭉친 가족과 직장 동료들이 빼곡하게 모여 마지막 길을 함께한 최은희씨의 55년 일생이 그리 길지 않게 요약되어 있다.


그녀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정치인도 아니고 영웅도 부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런 색깔이 없는 그냥 보통사람 이었다. 평생 사사로이 남을 속이지 않고 맡은 일에 성실하며 타인을 배려했던 보통사람이었다. 노력한 만큼 거둔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결코 좌절하는 법 없이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던 보통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식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보통의 어머니였다. 그런 보통사람 최은희의 삶에 대해 꼭 남기고 싶어서 저자는 그녀의 일생을 책 말미에 실으며 그녀의 명복을 빈 것이다.


이 작업은 그에게 참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그 마지막 말에서 나는 다산 정약용이 그가 만났던 보통사람들을 글로 적어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던 그 마음을 다시금 읽었다.

다산 정약용

다산은 자신이 교유하거나 만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산문으로 많이 남겼는데, 이는 인간존재의 의미가 역사적 기억을 통해 완성된다는 신념과 연관되어 있다. 다산은 한 인간에 관한 사실과 진실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그 사람이 역사적으로 바르게 기억되고 평가되길 원했다.  구체적인 예로  어떤 편견이나 우월감 없이 인간을 공평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여준 예술가 정천용, 정치가 잘못되는 까닭은 항의할 줄 아는 백성이 없어서라며 백성의 고충을 호소하며 자수한 이계심,  “어머니의 노고가 더 큰데도 왜 유교에서는 아버지를 더 중시하느냐”는 단순명쾌한 질문으로 천지간의 지극히 정밀하고 미묘한 뜻을 말해  다산에게 깊은 깨달음을 준 밥 파는 노파가 있다.(이 노파의 은 영화 '자산어보'에서 배우 이정은이 열연한 가거댁의 대사에도 다소 변형되어 나온다)


또한 자신에게 후의를 베풀어준 사람들의 삶을 기록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다소나마 표하기 위해 그들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대표사례가  왕족이었음에도 중인 계급이 하던 의술을 펼쳐 돈 없는 서민들을 찾아다니며 수많은 목숨을 구한 몽수 이헌길이다. 다산은 어린 시절 홍역을 앓다 그의 의술 덕분에 살아났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몽수의 처방을 보완하여 <마괴회통>을 저술하는 한편, 이헌길의 전기를 써서 수많은 인명을 살려내고도 한결 같이 겸손하고 너그러웠던 그의 인품을 기렸다.


기록, 글쓰기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말 어떤 이를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오래오래 기억하게 하고,

그의 삶이 지닌 진실을 올바로 평가해 우리에게 남기는 것.

그래서 글쓰기는 진실해야 하고, 아무렇게나  써선 안 되는 행위다.


오늘도 한 편의 글을 쓰며 나 자신에게 다짐해본다.

진실하게 쓸 것을, 마음을 다해 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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